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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당국의 개입 강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강력한 구두개입을 통해 환율을 묶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장에서는 당국이 오는 4월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발표가 예정돼 있는데다 미 환율정책의 '슈퍼 301조'로 불리는 베넷-해치-카퍼(BHC·Bennet-Hatch-Carper) 법안이 발효된 점 등을 감안해 신중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서도 지금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문가들은 당국이 미국의 '오해'를 살 만한 수준으로 강도 높게 시장에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쏠림현상을 완화하는 역할은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크게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12월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2016년 네 차례 금리 인상을 예고했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 17일 올해 두 차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달러 가치가 주요 통화에 대해 일제히 약세로 전환한 것이다. 국제유가가 상승세로 돌아선 것도 달러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데 한몫했다.
우리나라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원화 강세의 기저에 깔려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3·4분기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은 8.0%로 전체 회원국 중 5위다. 독일(8.7%)보다는 소폭 낮지만 일본(2.9%)에 비해 크게 높다. 2011년 186억6,000만달러에 그쳤던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는 지난해 1,058억7,000만달러까지 불어났다. 미국 금리 인상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점차 걷히고 경상 흑자 등 우리 자체적인 요인까지 겹쳐 있다는 점에서 원화 강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당국의 개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국의 행보가 너무 신중하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외환시장의 한 딜러는 "2월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을 때는 당국이 강력하게 구두개입을 했는데 환율이 크게 떨어지는 지금은 그런 움직임이 없다"며 "신흥국 통화가 대부분 달러화에 강세를 보이는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국이 너무 소극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뒀던 지난해 10월 상황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다음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발표는 4월이다. 여기에 환율조작국에 무역보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BHC 법안도 지난달 발효됐다. 또 늦깎이로 가입을 준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환율원칙'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라는 원화 절상 압력이 높은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미세조정(스무딩오퍼레이션)에 나설 경우 수출을 위해 환율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줘 환율조작국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환율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2014년 4월 환율보고서를 통해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개입했다. 원화 절상 때 더 공격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10월 보고서에서는 "5~7월 사이에 대규모 환율시장 개입이 있었다"고 적시했다. 2015년 들어서는 "외환시장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보름 새 원·달러 환율이 60원 가까이 내렸음에도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는 "대체로 균형이 잡혔다"며 수위를 낮췄다.
전문가들은 당국이 너무 미국을 의식한 나머지 큰 변동성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환율이 급격히 떨어지면 수출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만큼 당국이 적정한 미세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넷-해치-카퍼(BHC) 법안이란
환율조작국에 무역 보복… 외환시장판 '슈퍼301조'
'무역법1974'를 새롭게 수정한 '무역촉진법 2015' 중에서 교역 상대국의 환율에 관한 규정을 통칭하는 법으로 약칭 BHC 법안으로 불림. 환율 개입이 의심되는 국가를 심층조사국으로 분류해 조사한 뒤 1년의 협의기간을 통해 이를 시정하도록 하지만 시정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구체적인 무역보복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근거가 담겨 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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