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장기영 선생은 언론사(史)에서도 거목이었다. 부총재를 끝으로 한국은행에서 나온 후 그는 지난 1952년 제10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태양신문을 인수해 1954년 한국일보, 1960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지인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한다. 백상은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을 통해 생전 내내 ‘언로(言路)’의 선두에 서 있었다. 나아가 자매지 코리아타임스·소년한국일보·일간스포츠 등을 거느리며 대중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날 백상의 언론 부문 업적을 소개한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는 “백상은 언론 부문을 초월한 미디어 기업가였고, 또 저널리즘이라는 국한된 영역을 벗어나 미래 지향적인 콘텐츠 크리에이터였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백상의 언론관에 대한 일화들은 우리나라의 ‘기자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사는 발로 써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언론인들이 귀감으로 삼는 말이다. 심 교수도 이날 “납이 녹아서 활자가 되려면 600도의 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활자화되는 기사는 600도의 냉정을 가지고 써야 한다. 이 양극을 쥐고 나가는 게 신문”이라는 백상의 평소 신념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언론의 독립성도 그가 강조했던 항목이다. 그는 사주였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당시 같이 일했던 언론계의 원로들은 백상을 “다혈질이고 매사 직접 챙기고 사실상 자신이 편집국장이기도, 심지어 기자 역할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심 교수는 이 같은 그의 개인적 성향뿐만 아니라 언론사의 사주로서의 역량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백상을 ‘미디어 기업가’ ‘언론벤처 창업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한류, 창조경제 선구자’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그가 사주 시절 기자들과 얽혀가며 했던 집단적 의사결정은 시대를 앞선 경영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백상은 대중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심 교수도 “신문기자는 시인이 돼야 한다. 시와 그림이 가득 찬 신문 이것이 장래의 신문이다. 신문 제목 하나하나가 시”라는 백상의 소신을 강조했다. 1960년대 당시 서울경제신문 1면에 매주 시가 올라왔던 것도 백상의 이 같은 소신 때문이었다.
백상은 대중문화 발전과 관련된 취재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심 교수는 “인간문화재 취재를 많이 했던 예용해 기자를 백상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는데 이는 우리 차 문화를 널리 알린 ‘뿌리 깊은 나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가 녹차 산업을 일으켰고 이게 현재 서경배 회장의 녹차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K뷰티’로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의 탄생 비화도 밝혔다. 그는 “백상이 당시 집 한 채 값을 주면서 장길산이라는 소설의 조사를 위해 쓰라고 줬는데 보름 만에 술을 마시는 데 돈을 다 써버렸다. 돈을 다 쓰고 찾아온 그에게 다시 그에 버금가는 돈을 주며 돌려보냈던 게 백상”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는 마지막으로 “사양산업에 접어들고 있다는 신문도 새로운 콘텐츠 포맷을 만들어야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백상에게서 이 같은 우리가 가야 할 미래 지향점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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