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비서실에는 5개의 초인종, 13대의 전화, 남자 비서 3명, 여자 비서 4명이 있었습니다. 집무실과 제1·2응접실은 언제나 만원이었어요.”(손명현·당시 부총리비서실 근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도통 성과가 나타나지 않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궤도에 올릴 2대 부총리로 백상 장기영 선생을 발탁했다. 그러나 40대 신문사 사주를 경제수장으로 맞는 관료사회의 반감은 엄청났다.
‘육성으로 듣는 경제 기적 편찬위원회(위원장 진념)’가 지난 2013년 출판한 ‘코리안 미러클’에는 백상이 관료사회를 어떻게 장악해나갔는지 실감 나게 묘사돼 있다. 백상은 공무원 조직의 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거침없이 지시했고 회의에도 격식이 없었다. 회의는 한꺼번에 2~3개가 열렸고 백상은 회의실을 오가며 의사결정을 내렸다. 물가 등 핵심 현안이 국장·차관보·차관을 건너뛰어 과장과 부총리의 결재만으로 통과될 때도 허다했다. 장관실을 활짝 개방하다 보니 장관실은 늘 공무원들과 민원인들로 북적거렸고 백상이 속사포처럼 지시하고 호통치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백상 하면 당시 공무원들이 떠올리는 것은 악명 높은 심야 ‘녹실회의’다. 공식 경제장관회의에 앞서 정책을 사전조율 하는 회의인데 서울 세종로 기획원 3층 부총리실 옆 소회의실(녹실)에서 열렸다. 회의는 예고 없이 오후7시에야 소집됐고 장 부총리는 뜻이 관철될 때까지 경제장관들을 물고 늘어지며 밤이 깊도록 회의를 끝내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는 ‘회이불의(會而不議), 의이불결(議而不決), 결이불행(決而不行)’이라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 만나서 회의하지 않는 것, 회의하고 결정 내리지 않는 것, 결정하고 행하지 않는 것 등 세 가지를 경계하라는 의미다. 실천하지 않으면 못 견디던 그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다.
당시 물가는 서민층의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가장 민감한 이슈였다. 백상이 부총리로 취임한 해인 1964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35.4%까지 치솟았다. 백상은 서민층의 생필품인 ‘쌀과 구공탄’의 가격 상승을 막겠다며 여기에 ‘흑백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가는 신앙이다”라고 외치며 현장점검도 강화했다. ‘신앙’이라는 말 때문에 출입기자들은 오전4시에 나서는 시장점검을 ‘물가안정 새벽기도회’라 부르기도 했다. 그 결과 1965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10%까지 잡힌다.
백상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 금융 시장은 고리 사채 시장만 비정상적으로 컸다. 금리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금융권과 정치권의 거센 반발로 감히 누구도 앞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상은 밀어붙였다. 당시 실무작업을 맡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훗날 “금리 현실화의 감독과 주연은 모두 백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외자 도입의 길을 뚫었던 것도 백상이다.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화학·시멘트 등 대규모 공장들을 짓기 시작했다. 훗날 과도한 외자 의존과 비리 사건 등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이 재원을 바탕으로 1965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연선기자 bluedash@sedaily.com 자료=코리안 미러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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