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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용선료의 추억

전성기 무리한 사업확장 부메랑

비단 조선·해운업만의 문제 아냐

제조업 내실 다질 전략 마련해야

박태준 금융부장




그때 그랬다. 여전히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그래서 흡연자들에게는 천국이지만 여기자들의 발길은 뜸했던 한 해운사 기자실에서 단연 화제는 용선료였다. 해운사 운임의 기준이 되는 발틱건화물지수(BDI)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해 1만1,000(5월6일 기준 631)이라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선을 돌파했던 2008년 봄의 이야기다.

해운사 임직원들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에 취해 흥분해 있었고 홍보실 직원들까지 하루 사이에 수십프로씩 오르는 용선료와 시장의 움직임을 나를 비롯한 출입기자들에게 흥미진진하게 전했다. “돈이 좀 있어 배 한척만 빌려 놓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겠다”는 아쉬움 섞인 농담부터 “헤지펀드가 배를 수십척 빌린 후 용선료가 더 오르기를 기다리며 홍콩항에 묶어 놓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까지 가득했다.

샴페인은 해운업계에서만 터진 게 아니었다. 조선업계도 마찬가지였다. 해운업 호황으로 선박 발주량이 늘자 조선사들은 앞다퉈 배를 만드는 공간인 도크를 늘렸다. 중고 선박을 수리만 해줬던 수리 조선소들이 벌크선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아파트를 짓던 지방 건설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분명한 사이클을 보이는 해운과 조선업의 업황이 이제 곧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그래서 물동량과 발주량 역시 조만간 크게 줄어들 것이며 국내 선박 건조 시설은 포화 상태를 넘어 심각한 과잉이라는 전문가 집단의 경고 따위는 철저히 무시됐다.

2016년 봄, 대한민국 경제를 늪에 빠뜨린 해운·조선업의 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호황에 취해 흐릿해진 경영진의 판단력, 그 대가는 혹독했다. 정부는 2009년 1월 2개의 퇴출 기업과 14개의 워크아웃 대상 기업을 선정했다. 조선사 중 C&중공업과 뒤늦게 조선업(대한조선)에 뛰어들었던 대주건설이 퇴출됐다. 대한조선·진세조선·녹봉조선 등 세 곳은 워크아웃 기업으로 분류됐다. 해운업계 역시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켜 갈 수 없었다. 같은 해 4월 정부는 중대형 해운업체 38개 중 4개사의 퇴출과 3개사의 워크아웃을 결정했다.

이 같은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이듬해에도 계속됐고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등 대형 해운사들이 주채권은행으로부터 재무개선 약정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 국내 조선·해운업계에 찬바람이 몰아칠 때도 세계 해양플랜트 발주 물량을 싹쓸이하며 대한민국 조선업의 자존심을 지켜줬던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빅3’까지 천문학적인 적자를 내며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은 2년여 전부터다. 그렇게 ‘해운과 조선 강국, 코리아’의 위상이 추락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조조정 자체도 ‘삼류’다. 전문가도 없고 뚜렷한 컨트롤타워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국책은행 출자를 둘러싼 정부 당국과 한은의 엇박자는 점입가경 수준이고 이러는 사이 금융시장의 불안만 더해가고 있다.

수년째 끝나지 않은 해운과 조선업의 구조조정을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어리석은 상상을 한다. 만약에 용선료가 천정부지로 오르던 그 무렵에 해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그 비싼 배들을 수십척씩 덥석 빌리지 않았더라면 건실하던 중소 조선사들이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도크를 늘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이제는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산업의 위기가 해운과 조선업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부질없는 상상의 영역을 넓혀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정상권인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휴대폰과 자동차 산업 등으로 말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새로운 버전이 들려오고 아이폰에 대한 열기는 도대체 식을 줄 모르며 차를 좀 안다는 지인들이 최근에는 온통 테슬라의 ‘모델3’ 얘기만 할 때 나는 갑자기 불안해진다.

/ju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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