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저유가 덕분에 1년 이상 호황을 누린 한국 정유업계에 공급과잉 위기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유사들은 윤활기유 같은 고부가 석유화학 제품의 비중을 높여 수익성을 방어한다는 전략이지만 전 세계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장기적 실적 하락이 불가피하다.
17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마진을 가늠할 국제지표인 싱가포르복합정제마진은 지난 1월 말 배럴당 10.4달러에서 4월 말 배럴당 5.8달러까지 떨어졌다.
SK이노베이션·GS칼텍스 등 주요 정유사들이 줄줄이 영업손실을 기록한 2014년(5.8달러) 수준까지 내려간 상태다.
정제마진은 원유를 사와 휘발유·경유 같은 석유제품으로 정제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마진으로 국내 정유사 이익의 60~70%를 차지한다. 업계는 통상 정제마진 4∼5달러를 손익분기선으로 본다.
국내 정유사들은 안정적 저유가 상태가 계속되면서 올 1·4분기까지 좋은 실적 흐름을 보였다.
4대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8,448억원)·GS칼텍스(3,159억원)·S-OIL(4,914억원)·현대오일뱅크(2,019억원)의 지난 분기 영업익 합계는 1조8,540억원으로 2조원에 육박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합계치 9,573억원과 비교하면 약 두 배로 뛴 것이다.
하지만 정제마진이 갈수록 나빠지면서 정유업계에서는 2·4분기부터 이전만큼의 실적호조를 누리기가 어렵다는 신중론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이르면 다음달, 늦어도 오는 9월 기준금리를 올려 하반기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 정유사들의 수익성이 더욱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벌써 이달 17일 종가 기준 원화는 미 달러당 1,173원70전으로 지난달 말(1,143원) 대비 2.7% 가까이 오르며(달러강세) 서서히 환율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유사는 해외 원유를 수입할 때 달러로 결제한다.
전문가들은 현재 정유 업황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장기침체의 전조일 수 있다는 성급한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선진국·신흥국을 막론하고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는데 중국과 인도·중동 등지에서는 신규 원유정제 시설 가동이 줄줄이 이어지며 공급과 수요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지난해는 원유 가격 하락에 따라 수요둔화 폭이 줄면서 정유사들이 실적호조를 기록했지만 올해부터는 이런 가격효과까지 사라져 수요둔화의 충격이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정유사들의 수요 위기가 2·4분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유사들은 정제마진 악화에 대비해 정유 부문보다 수익성이 높은 윤활기유와 파라자일렌(PX) 같은 고부가 석유화학제품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S-OIL의 경우 지난 분기 윤활유 원료인 윤활기유 부문과 석유화학 부문 영업이익률이 각각 39.2%와 22.7%로 뛰면서 전체 수익을 견인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세계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단기 효과에 그친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이달석 연구위원은 “정유사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같은 인근 시장 위주였던 고부가 제품의 판매처를 중동·아프리카처럼 먼 지역으로도 확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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