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디바이스의 상용화가 본격화하면서 콘텐츠 업계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가상현실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며 기술력을 갈고닦아온 대다수 콘텐츠 개발 기업들은 콘텐츠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VR 콘텐츠 전문 기업 ‘무버(Mooovr)’도 그중 하나다. 가상현실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지난 2011년 설립된 무버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기획·촬영·편집 역량을 키워오며 국내 대표 가상현실 콘텐츠 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윤정 무버 대표를 만나 가상현실 콘텐츠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얼마 전 콘텐츠 공급 논의를 위해 미국 페이스북 본사 관계자와 미팅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스쳐 지나가듯 ‘가상현실에서는 내가 신(神)이 될 수 있잖아요’라는 말을 건넸죠. 사실 이 얘기는 국내 가상현실 콘텐츠 기업 CEO들과 종종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농담 중 하나였거든요. 그런데 제 말을 들은 페이스북 관계자가 갑자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하더군요. ‘오큘러스(가상현실 디바이스 전문 기업으로 지난 2014년 페이스북에 인수됐다)가 저희에게 건넨 인수제안서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바로 신(God) 프로젝트였습니다’라고요.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페이스북이라는 글로벌 기업과 국내 스타트업이 생각하는 가상현실 시장의 이미지가 같다는 사실 때문이었죠.”
국내 1세대 VR 콘텐츠 기업 창업가
김윤정 대표는 국내 1세대 가상현실 콘텐츠 기업인이다. 김 대표는 지난 2011년 가상현실 기반의 동영상 콘텐츠 제작 스타트업 ‘무버’를 창업했다. 당시만 해도 가상현실은 미지의 시장이었다. 개념조차 생소한 가상현실 기술과 콘텐츠에 관심을 갖는 기업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무버가 자체 제작한 ‘롤러코스터’ 샘플 동영상이 소위 ‘대박’을 쳤다. 김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기획안만 갖고 미팅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샘플 동영상을 만들기로 결정했죠.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롤러코스터였어요.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동감 넘치는 효과를 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죠. 샘플 동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이후 콘텐츠 제작을 문의하는 연락이 빗발치기 시작했어요.”
현재 무버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는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명한 가상현실 디바이스 제조기업뿐 아니라 카메라, 렌즈, 소프트웨어 등 가상현실 관련 모든 산업군에서 무버가 제작한 동영상을 활용해 홍보·마케팅 활동을 펼칠 정도다. 김 대표는 “비단 무버뿐 아니라 다른 국내 기업들도 해외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며 “가능성 하나만 보고 꾸준히 기술 역량을 갈고닦아온 국내 업계의 노력이 빛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개념조차 낯설었던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김 대표는 최근의 가상현실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 대표는 말한다. “기업을 운영하는 CEO로서는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상용화가 본격화하면 더 많은 기회가 창출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저는 가상현실 시장을 주도하는 대기업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생이라는 개념을 가상현실 콘텐츠 시장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죠.”
생태계 조성 위한 대기업 인식 변화 시급
김 대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콘텐츠 업계의 인식 변화 양상을 소개했다. 김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소 의외였다. ‘개방과 혁신’이라는 이미지의 스타트업이지만 일부 분야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극단적인 폐쇄적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가상현실 콘텐츠 분야도 포함돼 있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가상현실 콘텐츠 시장의 존재감은 미미했습니다. 반면 콘텐츠를 제작하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굉장히 많았어요. 무슨 의미일까요? 기업들 스스로 시장을 만들고 키우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나는 잘돼야 하지만 넌 망해야 돼’라는 인식이 컸어요. 각자가 개발한 기술, 각자가 제작한 콘텐츠를 꽁꽁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수익성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시장에서 혹여나 다른 기업에 기회를 빼앗길까 우려했던 거죠. 저희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자체 개발한 장비와 기술을 전부 오픈했어요. 작은 시장에서 아웅다웅 싸우지 말고 함께 성장해나가자는 의미였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생태계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함께 이어가고 있죠.”
김 대표는 이 같은 인식의 변화가 대기업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가상현실 생태계 구축의 중심에는 대기업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역량 있는 국내 콘텐츠 기업보다 해외 기업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말한다. “동등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국내 기업보다는 글로벌 시장 공략에 유리한 해외 기업에 관심을 갖겠죠. 실제로 제가 만난 대기업 관계자도 ‘회사 방침상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점차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한번은 콘텐츠 기획 아이디어를 갖고 대기업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열심히 설명했고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스러운 뉴스를 접했습니다. 저희가 소개한 아이디어를 해외 기업과 제휴해 상용화를 시도한다는 소식이었죠. 물론 당시 아이디어가 그저 기획안에 지나지 않았기에 큰 문제로 삼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대기업이 국내 콘텐츠 개발사들을 그저 ‘아이디어 빨대’ 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우려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김 대표는 대기업이 발 벗고 나서서 가상현실 생태계 조성을 주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량 있는 국내 콘텐츠 기업들이 해외 시장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면, 분명 대기업도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김윤정 대표가 생각하는 가상현실 시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저는 가상현실 시장이 정말 ‘큰 사고’ 를 한번 칠 것 같아요.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가 삶의 질을 높였다면, 가상현실 기술은 한발 더 나아가 또 하나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상현실 속 인간의 삶은 현실과는 또 다른 가치를 제공하겠죠. 그래서 콘텐츠가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하니까요.”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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