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에서 대우조선해양에 지원한 여신이 지난 2014년 말까지는 금융권 전체 여신의 1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015년 들어 부실징후가 나오며 산은이 정상화 자금을 쏟아붓기 시작하면서 50% 이상으로 비정상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우리도 문제를 인식하지만 현재와 같은 체제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습니다.”
한 산은 고위임원의 말이다. ‘자율협약 기업 14개. 여신 10조원 지원. 자회사 130여개’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남은 산은의 안타까운 성적표다. 정권의 은밀한 개입 등 구조조정의 과정은 휘발되고 처참한 결과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설·정상화 자금 등 덩치 큰 자금을 대야 하는 산은의 숙명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산은의 역할로는 ‘제2의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다.
조선·해운 등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은행이 아닌 정권의 대리인으로 전락한 산은에 대해 ‘구조조정 집도의’로서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무리 정부가 100% 지분을 보유했다고 해도 현재 산은의 모습은 자체적으로 기업의 리스크를 평가·관리하는 은행의 모습이 아니라 정치권과 당국이 거래한 기업 구조조정 계획을 집행하는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산은은 산업발전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 어느 금융기관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산은은 기본적으로 은행의 본질인 커머셜(상업적)한 체질이 전혀 내재되지 않아 구조조정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정부의 입김에 대한 견제장치가 전혀 없다 보니 회생 불가능한 기업이라도 정부 당국에서 정상화가 결정되면 무조건적인 지원을 일삼아야 한다. ‘산은 중심의 정상화 자금 지원-기업 회생 불가 판명-출자전환 후 산은 대주주’식 구조조정 패턴을 막을 견제책 없이는 퍼주기식 구조조정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는 힘들 것이다.
산은 관계자는 “산은에 여신을 제한할 수 있는 브레이크가 없다 보니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협의를 한다지만 논의가 아닌 일방적인 하달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현재와 같은 체제에서는 산은이 지원을 멈추면 국책은행의 역할을 간과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 때문에 산은으로서도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산은의 현실적인 한계도 있지만 산은 스스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구실을 자처한 측면도 있다. 15일 감사원이 발표한 산은 감사 결과는 산은의 무책임한 기업 관리 실태를 여실히 보여줬다. 부실기업을 지원하려는 정부에 제대로 된 경고장을 날릴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바로 산은임에도 산은은 그 책임에 눈을 감았다.
이런데도 전임 산은 회장은 구조조정 책임을 놓고 산은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며 청와대, 정부 당국과 공방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산은 출신들이 기업 곳곳에 낙하산으로 내려가고 구조조정 일거리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서도 가장 ‘갑질’하는 클라이언트라는 비판도 받는다.
가장 큰 문제는 산은이 산업의 위험관리라는 역할을 상황 논리에 밀려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대우조선이 대표적인 예다. 산은은 지난해 12월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 지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우조선의 상황을 깨닫고도 총선을 앞둔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지원 의지에 무릎을 꿇었다. 그 결과 대우조선은 총 5조3,000억원에 달하는 추가 자구안을 내놓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4조5,000억원이 투입되고도 3년 만에 법정관리행을 선택한 STX조선해양도 마찬가지다.
국책은행으로서 산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시장의 목소리가 전혀 개입되지 못하는 현재와 같은 산은 운용체계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 기업은행과 비교해보면 산은의 주고객은 국내 최대 대기업으로 기은과 사이즈 자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기은이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은행의 본질인 상업적 바탕을 갖춘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은은 일부 기업공개(IPO)로 수익을 내 민간주주들에게 배당을 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면서 정부 입김에 대한 견제책이 마련됐다. 산은이 기은과 다른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은식 모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책금융으로 대기업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한계를 보이는 시점에서 산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업금융 시장에서 산은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민간 시중은행들의 기업금융 영역 성장을 제한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위원은 “현재 구조조정은 기업이 회사채 등 대출채권이 많기 때문에 산은 중심의 채권단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면서 “회사채 중심으로 개편되는 자본시장에서 시장 중심적 구조조정의 토대를 닦아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산은 내부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나오고 있다. 산은 고위관계자는 “현재는 산은의 역할에 대한 비판론이 워낙 높은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은의 역할과 정부 견제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면서 “산은과 정부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차분한 논의가 이뤄져 다음 정권에서라도 반영될 수 있는 틀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보리·양철민기자 bori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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