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가 세운 목발 제조업체를 물려받은 뒤 재활 보조기 제조업체로 탈바꿈시켜 90억원대 매출의 강소기업으로 성장시킨 유실근(61) 아미글로벌 대표는 최근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설립 52년 된 아미글로벌의 대표 자리를 아들인 유민혁(33) 실장이 아닌 경리 직원으로 일을 시작해 20년째 함께 일을 해 오고 있는 여성 임원 이순이(46) 상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것. 최근 대기업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고 중소기업 오너들이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경영권을 물려줄 지 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 대표의 과감한 결정이 업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유 대표는 22일 부산 사하구에 있는 아미글로벌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 취재진과 만나 “2~3년 뒤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올 계획인데 아들 대신에 업무 경험을 두루 갖춘 이순이 상무에게 대표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며 “아들이라고 무조건 후계를 잇는 것보다 적합한 인재를 대표자리로 올리면 회사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직원들 역시 스스로 노력하면 대표의 자리로도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 대표의 후계자로 선택을 받은 이순이 상무는 아미글로벌에 경리로 입사해 20년째 근무하며 다재다능한 인재로 성장했다. 유 대표는 이 상무가 실무자일 때부터 경리 일 이외에 생산과 영업 관련 업무를 하나씩 맡기며 다양한 업무를 폭넓게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뿐만 아니라 온라인 MBA 과정도 졸업하게 했다. 이 상무는 “일반적인 회사에서 경리 직원한테 맡길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는데 대표께서 미션을 주듯 부여한 업무를 이행해 오면서 임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됐다”며 “업무 범위가 넓어지자 대표께서 저에게 했던 것처럼 부하직원들에게 일을 하나씩 책임지게 하라고 하는 등 직원들에 대한 교육 철학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아들 유민혁 실장의 반응도 놀랍다. 유 실장은 “어릴 때부터 이 상무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자라왔다”며 “우리 회사가 성장하는 데 이 상무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제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을 더 잘 챙기고 있는데 대표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 자리를 맡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저도 욕심이 있기 때문에 이 상무보다 능력이 뛰어나게 될 시기가 되면 그때 가서 대표 자리에 도전해 보겠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미글로벌 직원들 역시 신뢰로 똘똘 뭉쳐 있다. 아미글로벌 직원들의 이직률은 2%가 채 안되고 절반 이상의 직원들이 10년 이상 장기 근속하면서 주변에 입사를 권할 정도다. 유 대표는 “20년 동안 모든 통장을 이 상무에게 맡겼고 나는 두 달 전에 통장 하나를 만들었다”며 “대표가 직원들에게 그만큼 신뢰를 주면 전 직원들간의 신뢰가 쌓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미글로벌의 출발은 유실근 대표의 부친인 유종식씨가 1965년 세운 아미실업이었다. 나무 목발 제조회사로 설립해 사업을 운영해오던 고(故) 유종식 대표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면서 유실근 대표가 승계를 하게 됐다. 1983년 유실근 대표의 취임 이후 IMF 사태 즈음해서 중국 수입품과 저가 알루미늄 목발이 쏟아지면서 재활 보조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이했다. 특히 아미글로벌은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지난 15년 동안 ‘닥터메드’, ‘스포메드’ 등 브랜드를 만들어 인지도와 매출액 모두 끌어올리고 있다. 현재는 의료 보조기구 분야에서 150여 종의 아이템을 생산하고 세계 30여개국으로 수출하는 명실 상부 재활 보조기 분야 국내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 대표는 “나무 목발 사업을 할 때 회사 도장이 찍히지 않은 제품이 출고된 적이 있는데 당시 가짜 제품이라고 반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며 “그때 브랜드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중소기업이지만 브랜드 알리기에 꾸준히 투자해 지금은 중소기업 제품임에도 업계와 소비자들에게 많이 각인돼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의 성장은 이 상무와 유민혁 실장이 이끌어 가도록 할 계획이다. 나무 목발 시장에서 재활 보조기 시장으로 업종을 전환한 것처럼 이 둘은 의기투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는 시장은 해양 스포츠 의류 시장이다. 이순이 상무는 “우리가 봉제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있고 이것을 더 활용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다가 해양 스포츠 의류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사업군의 판로 확장과 신사업 추진으로 아미글로벌은 2020년까지 3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유 대표는 “기존 사업의 성장성보다 신사업군의 성장성이 훨씬 높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신사업이 기존 사업군 만큼의 성장을 이룬다면 2020년까지 30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통과 제조를 분리해 더 전문화하고 글로벌 시장을 전략적으로 공략해 100년 기업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부산=박해욱·강광우기자 spook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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