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도를 꿈꾸다 산업디자이너가 됐다.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다 핀테크 창업자로 변신했다. 머지않아 자산운용업에도 진출하려 한다. 지난해 7월 개인 간(P2P) 대출업체 ‘렌딧(Lendit)’을 창업한 김성준(31·사진) 대표가 걸어온 길이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창업이 벌써 세 번째다. 생명공학도였던 그가 금융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사연도 기막히다.
김 대표의 학창시절 꿈은 생명공학자였다. 당시 동물복제 연구로 국민영웅 대접을 받던 황우석 박사의 영향이 컸다. 김 대표는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했다. 생명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그는 우연히 참석한 강연을 듣고 진로를 완전히 바꿨다. 당시 강연을 진행했던 글로벌 디자인 컨설팅 기업 ‘아이데오(IDEO)’ 직원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지난 5일 서울 중구 렌딧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흔히 ‘디자인’ 하면 제품 제조의 마지막 단계이자 예쁘게 꾸미는 작업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IDEO 직원의 말은 달랐다”며 “IDEO는 디자인이 제조의 첫 단계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실제 IDEO에는 디자이너가 전체 인력의 30% 정도이며 심리학자·의사·변호사 등 다양한 직종의 전문가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다음날 학교 행정사무실로 가서 전과 신청을 하며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게 됐다. 김 대표는 이후 병역대체 산업기능요원으로 NHN에서 게임디자인을 맡았고 삼성전자 디자인멤버십 등을 통해 디자이너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대학 4학년 시절 그는 또 엉뚱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집에서 우연히 인터넷 동영상을 시청했는데 아프리카 어린이가 소의 소변을 받아먹으며 연명하는 장면이었다”며 “불과 3시간 전 탄산음료 한 캔을 사서 반 정도 마시고 버렸던 나를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시작했다. 명칭은 ‘1/2프로젝트’였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말에 기부를 집중적으로 하는데 기부를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았다”며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때 빈곤층에 기부할 물품까지 함께 구매하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령 피자 한 판을 주문할 때 소비자가 피자 두 판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다. 한 판은 본인이 수령하고 나머지 한 판은 빈곤층에게 전달하는 형태다. 일부 기업을 찾아가 1/2프로젝트 참여를 요청했지만 어느 기업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돌파구를 디자인에서 찾았다. 세계적인 디자인 공모전에 1/2프로젝트를 출품해 유명해지면 참여 기업이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1/2프로젝트는 2009년 독일 레드닷어워드 우수상, 미국 스파크어워드 은상 등 네 가지 상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이후 국내 한 피자업체 등이 관심을 보여 1/2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 대표는 “수익을 고려하지 않았더니 회사 유지가 어려웠다”며 “나중에 경제적 여유가 생길 때 재개하는 것으로 하고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후 디자인에 대한 전문성을 더 키우기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창업 수업을 들은 뒤 이번에는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의 꿈을 펼쳤다. 그는 “의류 관련 소매업체들이 재고관리의 어려움에 직면한다는 점에 착안해 옷을 대량 판매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며 “패션을 선도하는 파워블로거를 통해 옷을 유행시키고 해당 옷을 대량 판매하는 플랫폼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체 ‘스타일세즈(StyleSays)’는 초기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용자가 100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사업의 성공을 예감한 김 대표는 스탠퍼드대 대학원을 중퇴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한때 좋은 조건에 스타일세즈를 매입하겠다는 제안도 들어왔지만 회사를 더 키울 자신감이 있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스타일세즈는 이후 심각한 침체를 맞게 된다. 김 대표는 “미국은 워낙 영토가 넓다 보니 배송을 위해 대형 물류창고가 많이 필요했다”며 “1~2일 안에 미국 전역 배송을 보장하는 ‘아마존’과 도저히 상대가 안 됐고 늦은 배송으로 인해 이용객이 줄면서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그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국내로 돌아와 금융기관에 자금대출을 신청했다. 은행을 방문했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신용등급이 낮아 대출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 5년간 체류하고 한국에서는 직업이 없다 보니 국내 신용등급이 6등급밖에 되지 않았다”며 “은행 대출을 포기하고 저축은행에 가서 문의했더니 연 대출금리가 22%에 달해 도저히 돈을 빌릴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 대출을 포기하고 미국 P2P대출업체 ‘렌딩클럽’의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으로 대출 검색을 했다. 그랬더니 대출금리가 연 7.8%에 불과했다. 그는 “당시 국내에서는 20%대의 고금리와 5%대의 저금리 사이에 있어야 할 중금리 대출을 거의 찾기 어려웠다”며 “스타일세즈의 사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생각에 차라리 ‘한국판 렌딩클럽’을 창업해 나처럼 중금리 대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김 대표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회사가 ‘렌딧’이다. 회사 이름은 ‘빌려주다(lend)’와 ‘그것(it)’을 결합해 지었다. 김 대표는 “국내 개인신용대출 시장은 미국의 4분의1 수준인 200조원에 달한다”며 “신용정보 수집체계가 상당히 잘 갖춰져 있는데도 중금리 대출업체가 없어 P2P대출업의 사업기회는 분명히 클 것으로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대학원 동기이자 삼성화재에서 위험률 예측과 분석 업무를 맡고 있던 박성용씨, 삼성화재 대출상품개발 업무를 담당했던 김유구씨와 의기투합해 렌딧을 시작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투자사 알토스벤처스가 투자금 15억원을 제공했다.
P2P대출업은 일반인은 물론 금융업계에서도 낯선 분야였다. P2P대출업계는 사업 형태를 우리의 전통적인 계와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다수에게서 자금을 모아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령 100명에게서 10만원씩 투자를 받아 1,000만원의 대출을 신청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형태이다. 투자자들은 8~12%가량의 수익을 얻을 수 있고 대출자도 제2금융권보다 저렴한 10% 안팎의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윈윈(win-win)’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다수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크라우드펀딩’을 지난해 7월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에 들어간 것은 증권형 크라우드펀딩뿐이며 P2P금융업이 속한 대출형 크라우드펀딩은 빠졌다. 당시 대출형 크라우드펀딩의 시장규모가 100억원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데다 자칫하다가는 금융규제가 덧씌워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금융당국은 P2P금융업을 대신 대부업법의 틀 안에서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렌딧 역시 대부업의 테두리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P2P금융업의 성장이 저해되고 대부업권과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김 대표는 이와 관련해 “P2P금융업이 대부업과 성격은 다르지만 과도기 단계에서 금융당국의 불가피한 조치라고 본다”며 “P2P금융산업이 커지면 관련 법령도 마련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렌딧은 창업 1년4개월 만에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최근까지 11개의 투자상품을 출시해 누적 대출금액 172억원을 돌파했다. 1개월 이상 연체율은 0.48%로 상당히 낮다. 김 대표는 매월 20%씩 대출금을 늘려 3년 뒤에는 총대출액 4,000억원 돌파를 목표로 삼고 있다. 수익을 내는 시점도 이 시기로 보고 있다. 김 대표는 “사업의 성과를 판단하려면 누적 대출액이 4,000억원 정도는 돼야 한다”며 “규모가 이 정도 되면 안정적인 수익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렌딧은 수익창출을 위해 올해 조금씩 변화를 가하고 있다. 그동안 대출자에게만 받던 수수료를 앞으로는 투자자에게도 받으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면서 기업은 적정한 수익을 내야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배웠다”며 “투자자들에게 적합한 수준의 수수료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고민해 하반기부터 수수료를 받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P2P대출업이 안정화되면 채권을 운용하는 자산운용으로 확장도 계획하고 있다. 김 대표는 “금융을 하나도 모르는 디자이너였는데 요즈음 금융이 너무 재미있다”며 “기존 금융에서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기술적으로 진화시키고 싶고 채권운용도 이런 면에서 관심이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동효기자 kdhyo@sedaily.com
▲김성준 렛딧 대표는
△1985년 안양 △서울과학고, KAIST 산업디자인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 기계공학 제품디자인 중퇴 △2005년 NHN 인터랙티브 그래픽 디자이너 △2005~2007년 올라웍스 UX디자이너 △2008~2010 삼성전자 디자인멤버십 △2009~2014 1/2프로젝트 운영 △2011년 미국 스타일세즈 창업 △2015년 렌딧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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