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원·달러 환율이 14개월 만에 1,100원 밑으로 미끄러졌다. 외환시장이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겼던 1,100원대가 뚫렸지만 당국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을 ‘환율 관찰국’으로 지목한 미국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원화강세 흐름이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을 지연할수록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험 선호 경향이 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신흥국으로 분류된 한국에 대한 투자자금이 빠르게 불어날 수 있다. 이는 결국 중국 경기둔화나 미국 금리 인상 등 불확실성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불안요소가 될 공산이 크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하루 앞두고 열린 10일 동향보고회의에서 금통위원들은 최근 환율동향과 전망에 대한 실무진의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통위는 지난 6월 기준금리를 1.25%로 0.25%포인트 인하할 당시 자금유출에 대해 가장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6월 예상과 달리 금리 인하 이후에도 자금유입이 이어지는 상황과 최근 환율하락이 수출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최근 원·달러 환율의 하락세가 가파르다는 점은 외환당국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종가 대비 10원70전 내린 1,095원40전에 거래가 마감됐다. 원·달러 환율이 1,100원대 밑으로 내려앉은 것은 지난해 6월 22일(1,098원80전) 이후 처음으로 종가 기준으로 지난해 5월22일(1,190원10전) 이후 14개월여 만에 최저치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외국인 주식자금이 잠깐 주춤하는가 싶었는데 신용등급 상향 조정이 다시 외국인 자금 유입 규모를 키우면서 환율하락을 견인했다”며 “당국이 꾸준히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을 했지만 미국 눈치를 보느라 눈에 띄게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원·달러 환율의 가파른 하락 속도를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응책을 내놓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이달 2일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원화절상 속도가 빨라 우려스럽다. 과도한 쏠림현상이 발생할 경우 적절한 시장정책을 취하겠다”며 구두개입을 한 게 전부다. 올 4월 환율보고서 발표 이후 미국이 우리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해 전방위로 압박하는 등 1,000억달러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눈총이 워낙 따갑기 때문이다.
한은이 환율 때문에 기준금리를 움직이기도 어렵다. 자금유입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준금리를 내려야 하지만 가계부채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인하 카드를 쓰기는 쉽지 않다. 한은이 이날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7월 말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673조7,000억원으로 전월 대비 6조3,000억원(주택금융공사 모기지론 양도분 포함)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 기록을 다시 깼다. 이주열 총재가 11일 금통위 직후 구두개입에 나설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원화강세가 미국 금리 인상이 다시 논의되는 시점까지 길게는 2개월간 이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이 9월에 금리를 안 올릴 거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보니 2~3개월 정도의 시야를 가진 쇼트텀 자금이 대거 들어오면서 원·달러 환율이 하락한 것”이라며 “1,000원대 중반까지는 무너질 가능성은 낮지만 원화 강세장이 길게는 2개월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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