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일상
금속 공예를 전공하고 보석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던 김을(62)은 순수미술로 전향한 뒤 참을 수 없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폭발시켰다. 서울관 1전시실의 27.5m 벽면을 가득 채운 1,450여 개의 드로잉들은 ‘원 없이 그림만 그렸겠다’ 싶을 정도의 물량공세다. 각 작품을 세세하게 보는 재미도 있지만 눈 닿을 수 없는 높이와 위치에까지 굳이 전시한 것은 그림에 대한 열정을 쏟아부은 예술가의 삶 그 자체를 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여겨진다. 그는 아예 전시장 안에 2층 건물 형식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재구성했다. 사람과 죽음, 실제와 가상,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예술가의 공간에서 관객은 별천지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벽면은 엽서크기의 드로잉 206개가 채웠다. 점심식사 후 종이컵에 커피 한잔을 꼭 마신다는 작가는 컵의 바닥을 대고 그린 원 안에 “식후 낮 1~2시께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즉각적으로 드로잉 했다. 딱 1년치 작업의 갯수로 작가가 일년 중 206일을 작업실에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김을에게 드로잉은 “온몸으로 대면한 거대한 세상에 대한 민감한 결과물”이란다.
◇사진의 왜곡과 오류
사진을 전공한 현대미술가 백승우(43)는 사진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맥락과 정보가 제거된 사진이 일으킬 수 있는 왜곡과 오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작가이지 기록과 서술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내가 사진을 차용해 쓰는 스토리가 반드시 진실에 기반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맥락에서 분리된 작품들은 해석의 오류를 유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크게 확대된 인물사진 수십 점으로 2층 높이의 벽면을 꽉 채운 ‘비트윈리스(Betweenless)’를 본 일부 관객은 독일 군인,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꽤나 구체적으로 사진 속 인물을 유추하려 애썼다. 작가는 1960~80년대 슬라이드 필름 속 작은 사진을 크게 확대한 작가는 배경과 주변 정보를 없앰으로써 사진의 맥락을 제거한 것인데, 오히려 감상자는 극히 제한적인 정보임에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을 알았다. 기록용도로 등장한 사진이 누구나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매체가 된 것을 두고 “기록은 공정하지만 기억은 언제든 다르게 해석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며 사진에 대한 경직된 해석의 틀을 깨라고 권했다.
◇탈북과 정착
북한 자수 공예가의 손을 빌어 작업한 자수 작품으로 유명한 함경아(50)가 이번 전시에서는 축구선수를 꿈꾸는 탈북어린이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악어강 위로 튕기는 축구공이 그린 그림’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의 악어강을 건너 탈북한 소년이 물감 묻힌 공을 능숙한 실력으로 드리블해 완성한 그림이다. 죽음을 각오한 탈출이라는 어두운 경험을 간직한 탈북 소년의 이미지와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방불케 하는 화사한 색감의 그림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또한 작가는 제작지원비로 “누군가의 망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이를 통해 “탈북 과정 중 느끼게 되는 초감각적 상황을 기록하는 비디오를 제작”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젝트는 미완으로 끝났고 대신 전시장에는 굳게 닫힌 셔터 설치작품과 탈북과정의 절박함을 암시하는 소음과 속삭임이 흐른다. 작품명 ‘언리얼라이즈드 더 리얼: 29,543+1명, 909,084㎞, 15,000달러’는 역대 탈북자의 숫자와 탈북자들의 총 이동거리, 평균 소요비용을 나타내 실현되지 않은 현실을 드러낸다.
◇이주와 이식
우리 사회의 그늘인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뤄온 조지은(41)과 양철모(40)의 작가그룹 ‘믹스라이스’는 비빔밥을 뜻하는 팀이름에서부터 뒤섞여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진학·취업·전세난·재개발 등의 이유로 옮겨다니는 사람들의 이주(移住)를 ‘덩달아’ 옮겨다니는 식물들의 이식(移植)에 빗대 신작을 선보였다. 강남 반포에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수령 천 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는 뉴스를 접한 작가들은 “그것이 어디서 온 나무이며 지난 1,000년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를 추적한 끝에 댐 건설로 인한 경북의 한 수몰지역에서 이식된 나무라는 것을 알게 돼 작업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천년 신화’를 컨셉트로 한 새 아파트를 위해 수백년 된 나무가 팔려가는 것은 그만큼의 ‘축적된 시간’을 파는 것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전시장에는 재개발지역에서 가져온 흙으로 반듯한 터를 만들고 그 위에 1980년대 강남 아파트의 도면을 그려놓았다. 뒤로는 재개발 지역에서 버려지고 자라난 식물들로 벽화를 그렸다. 나무처럼 흙에 뿌리박는다는 것은 불변의 제 자리를 잡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개발과 자본의 논리가 그 같은 믿음을 지워버렸다는 자조가 섞여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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