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말 기준 화폐발행잔액 91조9,265억원 중 국내 최고액권인 5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76.6%인 79조4,308억원이다. 매수를 기준으로 해도 5만원권은 14억900만장으로 전체 지폐발행잔액 47억9,300만장의 29.4%나 된다. 시중의 유통되고 있는 지폐 10장 중 3장은 5만원권인 셈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회수율은 올해 상반기 50.7%에 그쳤다. 회수율은 특정기간에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 대비 돌아오는 비율을 말한다. 시중에서 사용되지도 않고 은행에 돌아오지도 않는다면 그 많던 ‘신사임당’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고액권이 지하경제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화폐의 종말-지폐 없는 사회’(원제 The Curse of Cash)에서 종이화폐(지폐)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한다. 이유는 지폐가 불법행위를 부추기는 것과 함께 경제정책의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지폐를 없애야 하는 시대가 됐으며 시스템적으로도 가능하다고 봤다.
지폐의 어두운 측면은 미국도 비슷하다. 미국의 지폐 공급에서 최고액인 100달러(약 11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금액기준으로 8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지갑에 들어있는 현금은 평균 74달러다. 100달러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5%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5만원권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미국에서 100달러권을 내놓으면 의혹의 시선부터 받는다. 미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 대비 7.1%로 추정된다. 저자는 이런 고액권 화폐를 폐지하는 조치만으로도 탈세를 현재의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약·인신매매·뇌물 등에선 늘 고액권이 등장하지 않는가.
저자는 거시경제 차원에서도 지폐의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각국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마이너스금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금리는 옛말이 됐고 적절한 저금리 정책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마이너스 금리의 최대 걸림돌은 지폐다. 지폐는 엄밀히 말하며 ‘제로금리의 무기명 소지자 채권’이다.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을 때 투자자들은 정부의 단기채권을 현찰로 바꾸게 된다. 채권은 마이너스 금리가 되지만 지폐는 마이너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지폐의 구조적인 이유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마이너스 금리정책이 ‘절름발이’였다고 지적한다.
반론들에 대한 대답도 잊지 않는다. 우선 지폐를 없애면 눈에 띄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충전식 카드나 신용카드, 스마트폰 계정 등이 널리 보급돼 있기 때문에 문제가 적을 것으로 본다. 또한 충격 완화차원에서 고액권은 즉시 폐지하더라도 저액권이나 동전 등은 10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봤다.
저자는 화폐를 둘러싼 담론에도 책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화폐라는 것이 어떤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역사상 초기에는 조개나 소금 등 상품화폐가 있었고 이것은 금속화폐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종이화폐로 변화했다. 즉 화폐제도라는 것은 시대의 산물이다. 금융시스템의 발달과 비트코인 같은 전자화폐의 등장에 따라 종이화폐(지폐) 시대가 저물어 간다고 해서 이것인 역사의 퇴행은 아닌 것이다.
책에 따르면 실제로 이미 지폐를 없애기 시작한 국가도 있다. 스페인은 1,000크로나(한화 13만원)의 지폐를 지난 2013년 없앴다. 이후 유통되는 현금 규모는 2009년 1,060억 크로나에서 2015년 770억 크로나로 줄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용카드로 거래로 하고 교회 등에 헌금도 가능하다. 1만6,000원 /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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