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한진해운의 한 관계자는 대화 도중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차원이 아니었다. 20년 가까이 우리나라를 대표해 세계 경제의 역군으로 일해왔지만 하루아침에 그 자긍심이 송두리째 무너진 데 대한 허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 대한 원망과 글로벌 해운 업계에서의 한진해운의 위상을 무시한 채 금융 논리로만 생사를 결정한 정부에 대한 분노도 묻어났다.
이 관계자는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데 대해 한진해운 직원들 모두 책임을 통감한다”며 “그러나 과연 경영사정이 구조조정의 핵심 잣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머스크나 MSC·에버그린 등 글로벌 해운사 대부분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해운업황 자체가 바닥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덴마크와 스위스·프랑스 등은 국가 차원에서 국적선사의 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고 있다”며 “결국 글로벌 치킨게임에서 한진해운이 아닌 대한민국이 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진해운의 또 다른 관계자는 “금융논리로 구조조정 원칙을 세운 것부터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부는 채권단의 추가 지원이 없다는 금융당국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지만 한진이 37년 동안 쌓아온 업력에 대한 이해, 물류대란 우려 등 다른 요인들은 과연 고려했는지 모르겠다”며 “금융당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 전반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나 청와대 차원에서 중심을 잡아주지도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일까지 중국은 물론 스페인·미국·캐나다·싱가포르·호주·일본 등 세계 각국의 항만에서 하역작업을 거부당하는 등 억류 상태에 있는 한진해운 선박만도 45척에 달한다.
정부는 한진해운의 핵심인력과 네트워크를 현대상선으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한진해운의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복안을 세웠다. 이에 대해 한진해운에서 2,000여곳의 화주들을 관리하는 한 관계자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직무 특성상 현대상선으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높은 그는 “현대상선으로 이직하면 끌어올 수 있는 고객은 2,000여곳 중 많아야 10곳 정도”라고 말했다. 이유는 단순 화물운송뿐 아니라 선적부터 하역·지상이동까지 총체적인 서비스가 화주들이 거래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수년째 같은 업무를 하면서 각 고객사의 담당자들과 인간적인 관계는 충분히 맺었다고 생각한다. 법정관리 소식을 들은 고객사 관계자들 중 개인적인 관계는 유지하자는 사람도 여럿 있다”며 “그렇다고 해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인식이 강한 해운업의 특성상 나만 보고 따라올 화주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진해운 직원들 사이에서는 지난 2013년 최은영 전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뒤 회사를 살리기 위해 1조7,000억원을 쏟아붓기는 했지만 마지막 순간 손을 놓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 대한 원망도 컸다. 회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많은 동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 회장이 선친이 설립하고 키운 해운을 설마 포기하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분위기도 커지고 있다. 한진해운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에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직원들이 힘을 모아 살리자”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한 직원은 게시판을 통해 “정부의 못된 정책(짜고 치는 고스톱)에 당한 게 억울하다”며 “우리 모두 현대상선으로의 인력이동은 절대 없다고 선언하고 급여 반납을 포함해 직원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또 다른 직원은 “한진해운 직원들로서 뭔가 목소리는 내야 할 것 아니냐”며 “선배들이 먼저 나서면 후배들이 동참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비록 노조는 없지만 임원들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며 “현 상황에서 회사를 살릴 방안에 대한 행동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신흥국 주재원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점도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요소다. 한진해운과 해운업계에 따르면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31일 중국의 모 지점에 고객사들이 동원한 용역 무리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밀린 대금을 지급하라”며 위압적인 상황을 조성했고 급기야 주재원들은 중국 공안의 도움을 받아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중국은 물론 멕시코 등 신흥국들에서는 갱들과 유착된 일부 화주들이 있다”며 “주재원들은 사후 처리를 위해 남아야 하지만 같이 간 가족들은 하루빨리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세계 곳곳에서 항만에 정박하지 못하고 공해상에 대기 중인 선박이나 압류된 선박의 선원들도 문제다. 보통 컨테이너선 1척에는 20∼22명의 선원이 승선하는데 정박 대기가 장기화하면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해지고 건강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다. 선박이 압류되면 현지 항만국의 통제에 따라 선박 유지를 위한 최소인원(6∼12명)이 의무적으로 잔류해야 한다. 이들 역시 압류기간이 길어지면 필수적인 지원 없이 방치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정부는 해외에서 억류된 선박의 경우 송환보험을 활용해 선원의 귀국을 돕고 선상필수품 공급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정박 대기 중인 선박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민규·박재원기자 cmk25@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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