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률이 치솟고 장기 백수 비중도 외환위기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실업의 질이 급격하게 악화했다.
특히 법원의 파산관리 기업 규모는 이미 외환위기 수준에 육박했다. 신용등급이 강등된 기업 수도 외환위기 이후 최대를 기록하는 등 기업의 사정도 악화일로다.
지금의 통계 수치대로라면 정부의 기대 섞인 전망이 무색할 만큼 한국 경제에 짙은 잿빛 구름만 잔뜩 낀 상황이다.
◇ 청년·장기실업 최악, 공인중개사 인기…‘외환위기 때와 판박이’
25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9.3%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무려 1.3%포인트나 껑충 뛰었다.
IMF 외환위기 여파에 시달리던 1999년 8월 10.7%를 기록한 이후 같은 달 기준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청년실업률은 지난 6월에도 10.3%를 기록, 마찬가지로 IMF 외환위기 때인 1999년 6월(11.3%)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실업률은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매달 같은 달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운데 이어 하반기에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면서 IMF 외환위기 수준에 근접하는 모양새다.
설상가상으로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장기백수’의 증가세도 이미 IMF 외환위기 수준에 육박한 상태다.
지난달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 수는 18만2천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6만2,000명이나 증가했다.
장기실업자 증가 폭은 실업자 기준을 구직 기간 1주일에서 4주일로 바꾼 1999년 6월 이후 최대, 실업자 수는 1999년 8월 27만4,000명을 기록한 이후 같은 달 기준 최대치이다.
지난달 전체 실업자 중 장기실업자 비율도 18.27%로 급증해 IMF 위기 당시인 1999년 8월(20%) 수준에 바짝 다가섰다.
올해 다시 시작된 공인중개사 시험 열풍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 공인중개사 시험 신청자는 19만1,000여명으로 작년보다 4만명이나 늘었다.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에도 실업과 생활불안 탓에 공인중개사 시험 신청자가 이전보다 7만여명 늘어나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선 바 있다.
고용시장의 악화는 직·간접적으로 가계소득의 정체와도 맞물려 움직이는 양상이다.
올해 2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명목 기준)은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0.8% 증가한 데 그쳤다.
가구소득 상승률은 2014년 1분기부터 지난해 2분기까지 2∼5%대를 기록했다가 지난해 3분기 0.7%로 뚝 떨어진 뒤로 4분기 연속 0%대를 맴돌고 있다.
◇ 파산급증·신용등급 강등…산업 통계도 ‘IMF 위기 수준’ 곤두박질
예사롭지 않은 경기침체 징후는 산업 지표 곳곳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신용평가사들이 무보증 회사채 신용등급을 내린 기업은 159곳으로, 전년보다 26곳 늘었다.
신용등급 강등 업체 수는 2010년 34개사 이후 꾸준히 증가해 2014년 133곳까지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160곳에 육박한 것이다.
이는 IMF 위기 직후인 1998년 171곳이 강등된 이래 17년 만에 가장 많은 숫자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제조업 엔진도 점차 식어가고 있다.
지난해 연간 제조업 가동률은 74.3%로 1998년 67.6%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올해 2분기에는 제조업 가동률이 72.2%까지 떨어져 IMF 위기가 계속되던 1999년 1분기(71.4%)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근접하는 모습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한국 경제가 IMF 위기 당시보다 더욱 긴 경기 수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2011년 8월 경기순환에서 정점을 찍은 뒤 5년 넘게 경기 수축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29개월간 경기수축이 이어진 것보다 훨씬 긴 것이다.
정부는 이런 현재 경제 상황이 앞선 금융위기 때와는 다른 양상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대내외적으로 경기 하방 요인이 산재한 엄중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지금은 과거 IMF 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글로벌 수요가 부진해 수출이 저조하고, 외환시장으로 대표되는 대외여건이 매우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유 부총리는 “구조조정 문제 등으로 투자도 저조하다”면서 “구조적 문제에 의해 자칫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할 때”라고 말했다.
◇ “실물경기, 외환위기 직후 수준…체감 경기 살리는 선제 정책 필요”
전문가들도 현재 경기 불황이 외환위기 때와는 분명 성격이 다르지만 일부 경제 부문은 외환위기 직후 수준만큼 나빠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IMF 외환위기가 짧고 강한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최근 경기 부진은 충격은 덜하지만 더 길게 이어지고 있어 국민이 느끼는 체감 고통은 더 나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외환시장 관련 지표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물경기는 외환위기 직후와 거의 유사한 정도로 가라앉았다”며 “실물 부문 부진이 금융 부진으로 전이되는 경제 위기가 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우려했다.
성 교수는 특히 “국제적인 경기 하강과 원화 강세 때문에 대외 의존도가 높은 부문에 충격이 상당할 것”이라며 “디플레이션 우려로 소비와 투자를 미래로 미루면서 내구재 관련 소비·투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IMF 외환위기는 충격이 확실히 강했지만 1년∼1년 반가량 단기적인 영향으로 끝났다”면서 “현재는 충격의 강도는 IMF 외환위기 때보다 약하지만 2%대 저성장이 굳어지는 등 경기 부진이 너무 길어 국민의 체감 경기가 더 좋지 않아진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 실장은 청년층 실업 등 고용문제에 대해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실업자가 한꺼번에 양산되는 시스템이었다면 최근 청년층 실업자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자꾸 누적된다”며 “IMF 때 실업자 양산보다 지금이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구조적인 경기 부진까지 겹친 현 상황에선 경제 반등의 물꼬를 트기가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체감 경기를 살리는 한편 선제 정책으로 경기 살리기 마중물을 부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주 실장은 “경제가 살아나려면 수출이 잘 되길 바라야 하지만 현 상황에서 수출을 살릴 수단은 마땅하지 않다”며 “다만 내수 심리가 악화하는 것을 막고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산업정책을 펴고 서비스업 활성화로 더 많은 일자리가 나오도록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 교수는 “현재 정부가 쓰는 여러 정책은 경기 하강이 확인된 후 사후적으로 일부 조정하는 수준”이라며 “이런 형태의 정책은 경기 하강을 지연시킬 순 있어도 경기를 반전시키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어 “통화, 재정, 구조개혁 세 가지를 전방위적으로 추진하며 경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신뢰를 경제주체들에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세종=이태규 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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