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국책은행 자본확충 문제를 놓고 충돌했던 정부와 한국은행이 이번에는 경기부양 주체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미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서로의 정책을 품평하며 날선 공방을 벌였다.
선공은 이주열 총재가 날렸다. 지난 4일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내년 예산을 확장적으로 잡았다지만 경기회복에 충분한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며 “(경기회복보다) 재정 건전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이 총재가 재정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이 400조7,000억원으로 올해 푸는 돈(398조5,000억원, 추경 포함)에서 찔끔(0.6%) 늘어나는 데 그치자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 재정이 제 역할을 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내년 예산안은 올해 본예산(386조 4,000억원) 대비로도 3.7% 증가에 머물러 경제가 팽창하는 만큼(내년 경상성장률 정부 전망치 4.1%)도 늘지 않았다.
이 총재가 신경을 건드리자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반격에 나섰다. 그는 8일(현지시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기준금리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알아서 할 것”이라면서도 “(인하) 여력이 있다”고 밝혔다. 유 경제부총리는 “각국이 확장적 통화정책을 펴왔고 거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면서도 “거꾸로 본다면 국내 금리는 여유가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미국·유럽·일본 등 주요국은 기준금리가 0%에 가까운 반면 우리는 1.25%로 비교적 높다는 것이다. 이 총재의 ‘재정역할론’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재정에 여유가 있지만 결국 성장을 위해서는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즉답을 피했다.
이에 이 총재는 “우리의 재정건전성은 세계 톱 클래스”라며 재정정책을 재차 압박했다. 이 총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재정정책을 확장적으로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건전성은 세계 톱 클래스”라며 “아직은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내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40.4%로 예상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5%), 미국(약 110%), 일본(약 230%) 등에 비해 현저히 낮다.
추가 금리 인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신호를 줬다. 이 총재는 “선진국처럼 제로금리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경기회복에) 미진하게 대응한 것은 아니다”라며 “현재 통화정책은 실물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완화적인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또 “지금까지 금리 인하는 예대금리를 낮추는 등 성과를 냈지만 추가로 인하했을 때 같은 효과가 계속 작동할지는 미지수”라며 “통화정책 여력은 있지만 가계부채 등 금융안정 리스크가 많이 퍼져 있어 (추가 완화는)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13일 금통위는 물론 당분간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은 낮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는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대한 평가도 내놨다. 그는 “저출산·고령화 문제 대응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은 내 경제연구원은 관련 연구를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총재는 “정권이 바뀌어도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장기적 플랜을 계속 밀고 가는 모멘텀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양측은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이날 정부와 한은은 참고자료를 통해 “양측은 경기상황 인식과 정책대응 방향에 대해 충분한 소통을 하고 있으며 이견이 없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유 부총리는 한일 통화스와프에 대해 “재무장관 회담 후 실무선에서 이야기하는 중”이라며 “합의 내용에 내실을 기하기 위해 시한을 정해놓지 않고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내년 미국의 금리 인상이 1회에 그친다면 한국은 통화정책으로 충분히 흡수할 수 있지만 4회 정도 인상한다면 온갖 정책을 동원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다만 그는 “최근 IMF가 미국 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는데 그게 맞다면 추가 인상 여지는 작아진다”고 평가했다.
이 총재는 경제성장률과 관련해 “7월 전망했던 2.7% 달성이 무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3일 발표할 내년 전망치에 대해서도 “유가 상승에 따른 수출 회복 등에 힘입어 (종전 전망 2.9%) 큰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가계부채에 대해서는 “가계부채가 명목소득보다 훨씬 높은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억제책이 필요하다”며 “다만 부동산 경기 냉각을 가져올 수 있어 실물경제를 감안해 단계적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종=이태규기자·김상훈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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