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밀가루, 설탕, 인스턴트 식품.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일 만큼 맛있는 식재료이자 음식이다. 하지만 이 음식들은 모두 당뇨 환자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러나 치료를 위해 억지로 멀리하려 해도 결코 쉽지가 않다. 마지못해 당뇨 치료에 좋은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맛은 좋을 리가 없다. 이 같은 당뇨 환자들의 애환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스타트업이 있다. 맛있고 건강한 당뇨병 환자용 식사를 제공하는 ‘닥터키친’이다.
최근 의학계에 암울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국내 당뇨 환자 (고위험군 포함)가 1,000만 명 수준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당뇨는 그 자체 문제 뿐만 아니라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질병이다. 의학계에선 당뇨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실명, 수족절단, 신경손상, 심장질환, 최악의 경우에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당뇨병 초기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이 같은 경고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당장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다. 의사는 간단한 문진과 현재 상태를 설명한 뒤, 약을 처방해준다. 일반적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진료 과정은 대략 이렇다. 하지만 당뇨 환자의 경우 약 처방 외에 또 다른 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바로 식단을 받아가는 것이다.
의사가 적어준 처방전을 들고 병원 내 영양사를 찾아가면 영양사는 당뇨병에 좋다고 알려진 식재료를 적어준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 적어드린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드세요.” 당연히 설탕, 소금 등 간을 내는 재료는 빠져있다. 하나같이 맛과는 관계없는 재료들로 가득하다. 환자들은 고민한다. 도대체 이것으로 뭘 만들어 먹으란 말이야?
박재연 닥터키친 대표는 당뇨병 환자들, 환자 가족들이 갖는 고민에 주목했다. 박 대표는 말한다. “흔히 우리는 쓴 한약을 들이킨 후 자연스럽게 사탕을 먹습니다. 입에 남아있는 한약의 텁텁함을 사탕의 달콤함으로 없애기 위해서죠. 하지만 당뇨 환자들은 그 흔한 사탕 조차 먹기 어렵습니다. 단 것은 당뇨에 좋지 않다는 의학적 상식 탓이죠. 환자들은 당뇨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그 흔한 ‘먹는 즐거움’ 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 주목했어요. 당뇨 환자들도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에서부터 저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박 대표의 말을 듣자 기자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그는 이런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왜 당뇨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당뇨 환자의 ‘먹는 즐거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일까?
우선 박 대표와 만나기 전에 전해 들은 그의 이력을 떠올렸다. 박재연 대표는 경영학과 출신이다. 졸업 후에는 굴지의 글로벌 컨설팅업체에 입사해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이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전략본부에서 경영혁신팀장을 역임했다. 창업 전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곳은 일본계 사모투자회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 대표가 걸어온 길과 당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로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런 고민을 하게 되셨죠?” 박 대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컨설턴트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산업 군을 접하고 분석했습니다. 의학 분야도 그 중 하나였죠. 사실 국내 의사들의 치료법이나 수술법, 다시 말해 의학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해외 의사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죠. 하지만 의학 산업은 의학기술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학과 연관된 다양한 산업이 탄생할 수 있고, 실제로 해외에서는 이런 의학산업이 발전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성장 가능한 우리나라 의학산업에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의학과 요식업의 조합이었어요. 어떤 질병을 타깃으로 삼아야 이 조합이 성공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렇게 한 고민의 결과가 바로 당뇨병이었습니다.”
박재연 대표는 스스로를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호기심이 생긴 분야에선 전문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그가 당뇨병과 요식업의 조합이라는 색다른 시도의 창업을 결정했다면? 당연히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박 대표가 아무리 공부를 한다 해도 의사 수준의 당뇨병 지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지금 ‘당뇨와 식이요법’이라는 주제로 전국각지에서 강좌를 열고 있다. 심지어 그는 병원에서도 강좌를 개최해달라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와 함께 강좌를 진행하는 전문가들은 모두 의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것일까? 박 대표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창업을 준비하면서 무작정 의사들을 찾아갔습니다. 당뇨 치료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말이죠. 그러자 문전박대가 돌아오더군요. 대부분 ‘당신이 당뇨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이런 사업을 하려고 하느냐’는 반응이었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적어도 당뇨병에 대해선 전문가가 되자고요. 그때부터 당뇨병과 관련된 국내외 연구논문과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으론 논문만 약 400편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달을 공부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왔죠. 그 후 다시 의사들을 찾아가 정확한 의학적 상식과 사업 아이템의 당위성을 설명하니 귀를 기울여주었습니다.”
박 대표의 치열한 노력은 이내 스타트업 ‘닥터키친’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닥터키친의 주력 사업은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맞춤형 식단 제공이다. 우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식단이 제공되는지 알아보자. 우선 닥터키친 소속의 레시피팀과 연구팀이 음식을 개발한다.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해산물로 구성된 지중해풍 음식부터 중식, 한식, 일식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음식을 개발한 뒤, 판매 후보군을 추려낸다. 이렇게 선택된 음식은 바로 고객에게 배달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검수과정을 거친다. 검수는 병원, 그리고 셰프가 담당한다. 병원에선 음식의 영양분과 재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당뇨병 치료에 효과적인 음식인지를 평가한다. 셰프는 일종의 ‘맛 자문’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을 거쳐 음식의 맛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 그렇게 당뇨병 환자들은 닥터키친의 음식을 통해 건강과 ‘먹는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된다.
특이한 점은 닥터키친이 제공하는 음식 중엔 흔히 당뇨병 환자들이 피해야 하는 음식으로 알려진 ‘자장면’과 ‘라면’도 포함돼있다는 것이다. 닥터키친 이용자들의 최고 선호 음식이 자장면이라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당뇨는 단기적인 처방으로 낫는 병이 아닙니다.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하죠. 음식 선정에서도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치료 목적의 특이한 메뉴개발보단, 대중적이고 일상생활에서 즐겨 먹는 음식을 보다 더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자장면이 대표적인 예죠. 닥터키친의 자장면은 밀가루 면이 아닌 가지로 만든 면을 사용합니다. 탄수화물과 포화지방이 낮기 때문에 당뇨 환자들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죠. 실제로 닥터키친의 자장면을 먹은 환자와 일반 자장면을 먹은 환자의 혈당수치 변화를 분석해봤더니, 전자가 후자에 비해 혈당수치 변화가 적었습니다. 이따금씩 ‘닥터키친 자장면을 먹었는데 혈당이 많이 올라갔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도 계시긴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저희가 반문을 합니다. ‘혹시 남은 자장 소스에 밥을 비벼 드시진 않았나요?’라고 말이에요(웃음).”
현재 닥터키친의 식단은 크게 단품메뉴와 코스메뉴로 구분되어 있다. 대다수 이용자들은 코스메뉴를 선택하는데, 2주 코스와 4주 코스로 나뉘어 있다. 가격은 끼니당 평균 1만 원 남짓. 코스로 계산하면 가장 저렴한 2주 코스의 가격이 11만 원 수준이다. 가격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 끼 식사로는 너무 비싸다는 의견과 가격을 올리더라도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해달라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박 대표는 양쪽 의견에 모두 공감하면서도 현 상황에선 지금 가격이 적정 수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슐린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인슐린에 의존하는 것을 꺼리는 당뇨 환자 대상 조사결과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식이요법으로 인슐린을 대체하고자 하는 환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 닥터키친의 가격이 비싸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좀 더 저렴한 가격을 원하는 이용자들을 위해 가벼운 메뉴 구성의 코스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재연 대표에게 닥터키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소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바로 ‘당뇨의 미슐랭 가이드’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뇨와 연관된 모든 음식, 식재료 정보를 담은 일종의 미슐랭 가이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예컨대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A라면은 당뇨 환자가 먹어도 괜찮지만, B라면은 피하라는 식이죠. 음식점, 식재료 등 종류와 분야를 막론하고, 당뇨 환자들이 닥터키친의 정보만으로 건강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론 당뇨 환자에게 먹는 즐거움을 제공하겠다는 창업 당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승승장구할 것이라 확신하니까요.”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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