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보유할 생각이 없다면 단 10분도 보유하지 말라.”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말이다. 그는 기업 가치가 높은 종목을 발굴해 매입하고 오랫동안 보유하는 ‘매수 후 보유(바이 앤드 홀드)’ 전략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5년째 박스권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는 국내 증시에서는 버핏의 장기투자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지난해 4·4분기 170%까지 낮아졌던 펀드의 매매회전율이 6개월 만에 다시 200%를 넘어서며 국내 증시에서는 ‘매수 후 보유’ 투자전략이 힘을 잃고 있다. 펀드의 안정적인 수익률을 위해 낮은 매매회전율을 추천했던 전문가들도 5년째 이어지고 있는 지독한 박스피 장세에서는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에 변화를 주는 투자전략이 적절하다고 인정한다. 강대권 유경PSG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CIO)은 “가치투자가 장기투자라는 공식을 버려야 한다”며 “시장 상황에 따라 다양한 포트폴리오 변화를 통해 수익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매매회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5년째 1,850~2,050포인트의 박스권에 갇혀 있는 증시에서는 보유보다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매수와 매도 시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상승장 초기에는 매수 후 보유 등 장기투자전략을 사용할 수 있지만 하락장에서는 떨어지는 주식을 추가 매수해 주가가 오를 때 빠른 수익률 회복을 노릴 수도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외변수에 취약해 증시의 변동성이 높았던 올해 증시는 버핏의 투자원칙을 고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수현 NH투자증권(005940) 펀드담당 연구원은 “올해 시장은 성장주 또는 가치주 강세와 같은 방향성을 띠기보다는 대형주 위주의 장세를 보였다”며 “펀드매니저가 한 가지 운용전략으로 대응하기 더욱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변덕스러운 증시에 펀드매니저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올 들어 주식형 펀드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초 이후 지난 12일까지 유출된 자금은 6조7,374억원으로 이미 지난해 순유출 규모(4조4,261억원)를 초과했다. 하반기 증시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 순유출 금액은 최근 5년간 최대 규모인 2013년(7조3,050억원) 수준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매수 후 보유’ 전략은 수익률을 깎아 먹는 촉매로 작용하며 가치주 펀드들의 성적표는 최하위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내에서 버핏의 투자전략과 맥락을 같이하는 메리츠자산운용의 올 2·4분기 펀드 매매회전율은 18%로 국내 자산운용사 가운데 가장 낮다. “주식은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2013년 펀드 출시 이후 줄곧 10% 내외의 회전율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성적표는 장기투자의 패배다. 올해 메리츠 펀드의 수익률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에 대응하지 못하며 곤두박질쳤다. 올 들어 메리츠운용의 주식형 펀드 평균 수익률은 -17.2%로 국내 운용사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펀드 자금도 2,082억원이 빠져나갔다.
반면 가치주 펀드이면서도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 운용을 한 ‘유경PSG액티브밸류’ 펀드는 올해 10.7%의 수익률로 국내 주식형 펀드(ETF 제외) 중 가장 높은 성과를 냈다. 일반 가치주 펀드와 마찬가지로 저평가된 종목을 편입하지만 오래 보유하지 않고 일정 수익을 내면 바로 포트폴리오 조정에 나선 결과다. 유경PSG의 회전율은 224%로 평균 회전율(201%)을 웃돌며 메리츠운용과는 12배 이상 차이가 난다. 강 CIO는 “한국의 저성장 국면에서 주가지수는 정체 양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막연한 장기투자는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의 변동성에 희생돼 손실만 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결과는 장기 저성장 박스권에 갇혀 있는 국내 증시에서는 시장 상황에 걸맞은 포트폴리오와 트레이딩 전략 구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보유종목의 주가 흐름과 증시 상황 변화에 따른 적절한 매매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장기 저성장이 지속되는 박스권에서는 일부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압축하거나 현금 보유 비중을 높이는 등 유동자금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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