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업계의 중심이 삼성물산 패션부문·LF 등 브랜드를 직접 만드는 제조업체에서 백화점·쇼핑몰과 같은 판매망을 갖춘 유통업체로 이동하고 있다.
대량 출점 및 비용 절감에 유리한 유통업체들이 불황기 돌파를 위해 ‘ 제조 겸업’에 열을 올리면서 속속 패션업 대항마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랜드-LF-삼성물산 패션부문-코오롱패션 순으로 형성된 ‘패션 4강’ 구도가 유통업체들의 잇딴 선전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들은 지난 1997년 이랜드가 패션업계 최초로 1조원대 매출을 기록한 이후 약 20년 동안 흔들림없는 4강 구도를 구축해 온 제조업체들이다. 지난해 매출도 이랜드 1조8,470억원, LF그룹 1조7,911억원, 삼성물산패션 1조7,383억원, 코오롱패션 1조1,516억원 등으로 기타 제조업체와 압도적 차이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르면 내년부터 이같은 패션업계의 매출 구도에 지각변동이 일 전망이다. 현대백화점그룹과 신세계그룹 등 유통 대기업이 최근 공격적으로 패션사업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경쟁사로 급부상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백화점·아웃렛·홈쇼핑 등 수백개의 유통채널을 바탕으로 자사 브랜드 매장을 빠른 속도로 늘리며 굳어진 4강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무엇보다 2012년 패션기업 한섬을 인수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행보가 매섭다. 한섬 인수 당시 2018년까지 패션부문 매출 1조원을 자신한 정 회장의 말대로 한섬의 매출은 빠르게 늘었다. 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한섬 매출은 2013년 4,626억원에서 2015년 6,154억원으로 늘어나는 등 매년 두자리수 성장률을 이어왔다. 최근 매각설이 돌고 있는 SK네트웍스 패션부문(지난해 매출 5,657억원)을 인수할 경우 단숨에 1조원 이상으로 규모가 불어나 지난해 기준(1조1,811억원)으로 코오롱패션을 제친 업계 4위가 된다. 이외에도 현대백은 최근 한섬의 신규 여성복 브랜드 ‘래트바이티’를 론칭하고 현대홈쇼핑에서 디자이너 정구호와 ‘J BY’ 브랜드를 선보이는 등 활발한 패션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유경 신세계백화점부문 총괄사장이 지휘하는 신세계백화점 및 신세계인터내셔날(SI)의 행보도 파죽지세다. 정 사장은 지난 3월 이탈리아 고급 남성복 ‘라르디니’를 론칭한 데 이어 8월 이후 남성복 자체 브랜드(PB) ‘코모도 스튜디오’와 ‘맨온더분’, 여성복 PB ‘V라운지’, 해외 패션브랜드 영국 ‘안야 힌드마치’와 미국 ‘스타터’에 이어 ‘폰타나밀라노1915’(이탈리아 잡화),‘델라 라나’(캐시미어),‘스튜디오 톰보이(캐주얼)’,‘SI빌리지’(온라인몰) 등을 선보이는 등 올해에만 무려 10여 개의 브랜드를 쏟아냈다. 브랜드 철수가 줄잇는 패션업계와 정반대의 파상 공세 속에 지난해 SI 매출은 1조1,176억원에 달하며 코오롱패션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2023년에는 매출 5조원을 목표로 삼았다.
유통업체들이 불황기 패션업계에서 나홀로 선전을 이뤄내는 이유는 이미 보유한 백화점·쇼핑몰 등 수백 개 매장을 자체 브랜드의 매장으로 바꾸며 대량 출점 및 생산 체제를 용이하게 구축할 수 있는데다 제조와 유통으로 이어지는 유통 단계를 절감, 저비용 구조에서도 앞서기 때문이다. 패션 매장이 점차 대형화되며 보고 즐기는 재미를 더한 체험 매장으로 바뀌고 있는 점도 트렌드를 읽고 적용하는 데 최적화된 유통업계의 경쟁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같은 유통업 우위 구조 속에 삼성물산패션·LF 등 기존 패션업체들은 수년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삼성물산패션은 지난 7월 남성복 브랜드 ‘엠비오’와 핸드백 브랜드 ‘라베노바’의 사업을 철수한 데 이어 수십여명 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랜드는 불어난 부채 해결을 위해 중국 핵심 브랜드인 ‘티니위니’의 글로벌사업권까지 매각했다. LF도 올해 질바이질스튜어트·일꼬르소의 백화점 매장을 뺐다.
업계 관계자는 “불황기 비용절감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자사 유통망에서 안정적이고 공격적으로 패션사업을 펼칠 수 있는 유통업체들의 경쟁력이 주목받고 있다”며 “최근 백화점들이 중저가 브랜드 유통채널인 쇼핑몰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어 향후 더욱 다양한 브랜드를 출시하며 업계 파이를 잠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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