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런 출장) 다시는 안 갈 거야…ㅠㅠ”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꿀 출장’으로만 알았던 독일출장은 그야말로 ‘헬 게이트’였다. 그 지옥문을 내 손으로 열었다.
원망할 사람이 없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문제는 출장 가기 일주일 전에 시작됐다.
그때 직감했어야 했다.
발은 뺄 수 있을 때 빼는 거라는 걸.
해외는 출장이 아니라 여행으로 가는 거라는 것도.
#. [독일 출장 D-7] 사람 ‘절대’ 변하는 거 아닌데…
박송곳 대리 : “이 대리, 혹시 독일 출장 나 대신 갈래요?”
나 : “(이 인간이 웬일이야…독일 간다고 한 달 전부터 노래 불러댈 때는 언제고…뭐, 나야 좋지만 ㅋ) 박 대리가 가고 싶어 했던 출장 아니었어요? 갑자기 저한테 왜…”
박 대리 : “아…내가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는데 결혼기념일이 껴있지 뭐야. 아내한테 점수 좀 따야지 않겠어? 가까운 데라도 놀러 가자는데 출장 간다고 하면 불같이 화낼 게 뻔해서”
나 : “아…그래도…(저 인간이 그럴 인간이 아닌데…약간 찜찜한데?)”
박 대리 : “이 대리가 싫으면 뭐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줘도 될까? 다들 가고 싶어하는 출장이잖아, 유!럽!출!장!”
(뭔가 가슴 한구석이 찜찜하기는 하지만 사실 가고 싶었던 출장이니까! 기회는 역시 왔을 때 잡아야 되지 않겠어?)
나 : “언제 제가 싫다고 했나요? ㅎㅎ 제가 대신 갈게요~”
박 대리 : “ㅋㅋ 그래 오면서 내 선물 꼭 사다 줘야 해~ 내가 양보한 거니까~”
나 : “(뭐 선물쯤이야 기꺼이) 네 그럴게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그 ‘불변의 진리’를 그때 나는 왜 망각했던 걸까.
박 대리가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걸 포기할 만큼 아내에게 애정을 쏟고 있지 않다는 것도.
유럽에 눈이 멀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독일 출장 D-2] 가이드도 아닌데 관광지 찾는 내 꼴이란…
오그래 팀장 : “이 대리, 출장 계획서 좀 변경해야겠던데 말이야”
나 :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 팀장 : “아직 얘기 못 들었나 보던데 이번 출장에 마상무님도 같이 가시는 거라…마상무님 스타일 알지? ‘일정 외 시간’에 관광코스도 봐둬야 할 거야~”
나 : “네. (잠깐만…내가 잘못 들었나?!!) 네? 마상무님이요?(제발 꿈이라고 말해주세요~~ 팀장님 ㅠㅠㅠㅠㅠ)
오 팀장 : “마상무님 말이야, 이번 출장 같이 가시게 됐어. 결정된 지 5~6일 정도 된 거 같더라고. 일단 마상무님 스타일 파악해서 코스 잘 짜둬, 플랜B도 세우는 거 잊지 말고.
나 : “………네………”
정말 꿈이었으면 싶은 순간 아닌가. ‘기피 대상’ 1호 마상무와 내가 독일을 같이 간다니.
유체이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날부터 독일로 출국하는 날까지 이틀 밤을 꼬박 샌 것 같다.
우리 마상무님이 만족하실 만한 코스를 알아봐야 했으니까. 하하하하하 ㅠㅠㅠ.
친구들이랑 심지어 남자친구랑 여행갈 때도 이렇게 열심히 여행을 준비해 본적이 없었다.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오직 ‘마상무’를 위해서 썼다니.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그때 박 대리가 떠올랐다. 박 대리는 분명 알고 있었던 거다. 내가 또 당했다.
박 대리가 나한테 좋은 걸 넘길 리가 없다는 걸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거다.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포기하면 편하다는 슬램덩크 할아버지의 말을 자꾸 곱씹으면서 빨간 토끼 눈으로 ‘독일여행’ 폭풍검색을 계속했다.
#. [독일 출장 D-day] 그렇게 일주일 동안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인천공항 내 커피숍 앞)
마상무 : “이 대리랑 같이 출장가는 건 처음인 것 같네”
나 : “네, 상무님. 일주일간 잘 부탁드립니다~”
마상무 : “내가 잘 부탁해야지~. 사실 출장이라는 게 말이야. 일 하면서 또 친해지고 그런 시간이 되는 거거든.”
나 : “하하, 그럼요. 상무님이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면 영광이죠.”
마상무 : “일 끝나면 회식도 하고 그러자고~하하”
나 : “네…한식당도 알아봐 뒀습니다(독일까지 가서 웬 한식이냐고? 아재들은 꼭 하루쯤은 김치찌개하고 삼겹살에 소주를 털어 넣어야 한단다)”
마상무 “하하하, 그래 하루쯤은 한식당에 가야지. 외국에 있는 한식당이 정말 잘하는 데가 많다니까.”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지금도 도통 알 수가 없다.
독일에서의 하루는 이러했기 때문…(지금 봐도 살인적인 업무 강도다)
새벽 6시 기상 후 일정 체크 및 업무
아침 8시 상무님 모닝콜 후 같이 조식(이것도 일이다, 상사와 하는 건 모든 게 일이다)
아침 8시 40분 호텔 출발
저녁 6시 호텔 도착 후 상무님 수발
새벽 1시 호텔 다시 도착 그리고 한국과 연락(독일의 새벽 1시가 한국에서는 아침 9시다, 내 업무는 도통 끝나질 않는다. 본사와 소통할 일도 상상 이상으로 아주아주아주 많았다)
새벽 2시~3시 쪽잠
다시 새벽 6시 기상
웃음도 안 나오는 하루 하루가 지나고. 공식적인 일정이 없는 딱 단 하루.
나는 완벽한 가이드로 변신했다.
마상무만을 위한 완벽한 가이드 말이다.
구석구석 상무님이 가보지 않았던 (알고 보니 매년 있는 독일 출장을 마상무님은 2~3년 전부터 빼놓지 않고 왔다고 한다) 곳을 찾아내고 혹여나 길을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독일을 누볐다.
그때 깨달았다.
정말 가이드는 어려운 직업이라는 걸 말이다. ㅠㅠ
특히나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VIP 고객과 함께라면 그 중압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고난은 독일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완벽한’ 고생을 하고 왔는데 다들 “독일 어땠어? 부럽다~”라거나 “유럽 정말 좋지?” 같은 속도 모르는 말을 해댔다.
여기에 아주아주 강력한 한방.
바로 박.송.곳. 대리.
박대리는 초췌한 내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대리, 잘 다녀왔어? 내 선물은?”
하.하.하.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거나 드세요’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꾹꾹 삼켜냈다.
앞으로 절대 네버! 에버! 이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출장 잘 다녀왔어? 재밌었겠다~”이런 말.
출장은 어느 경우에도 놀러가는 게 아니다.
그게 유럽 아니 유럽 할애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 ‘#오늘도_출근’은 가상인물인 32살 싱글녀 이서경 대리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 이야기입니다. 공유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로 제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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