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지탄(晩時之歎·때 늦은 한탄)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두 달만 일찍 터졌어도 혹시 기대를 걸어볼 만했지만….” (해운업계의 한 고위관계자)
국적 1위 선사였던 한진해운이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아 청산절차를 밟고 있는 가운데 지금이라도 한진해운을 되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대상선이 글로벌 해운동맹인 2M에 정식 승선하는 데 실패하고 주요 수출노선인 미주노선마저 잠식당하며 물류 대동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한진해운 회생 방안을 원점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난마처럼 얽힌 구조조정을 처리해 ‘화타(華陀)’로 불렸던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도 한 인터뷰에서 “한진해운만큼은 지금이라도 되살려야 한다”며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진해운 커지는 부활론…“현 상태론 사실상 회생 불가”=사실 금융당국이 해운업 구조조정의 집도의로 나섰을 때부터 재계에서는 한진해운을 정리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조언의 목소리가 컸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금융당국이 청산으로 가닥을 잡았던 지난 9월 이후에도 금융 및 산업계 일각에서는 “회사를 ‘굿 컴퍼니(우량자산)’와 ‘배드 컴퍼니(부실자산)’로 나눠 부실은 청산하고 굿 컴퍼니와 현대상선의 합병을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한진이 사실상 청산 쪽으로 기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전 부총리는 이 같은 분리를 통한 회생 방안을 제시했다.
물류가 무너지면 수출업체들의 비용 부담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수출 경쟁력을 잃어 국내 경제가 도미노 타격을 입게 된다는 논리다. 실제로 국내외 경기 하락 속에서 삼성전자 등이 괜찮은 영업이익을 냈던 배경에 물류비용 하락이 효자 노릇을 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한진해운 ‘부활론’에 대해 해운업계는 “이미 돌아오기 힘든 다리를 건넜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쓸 만한 우량자산은 이미 매각 절차에 돌입해 회사의 기초체력이 이미 무너졌고 설령 자산이 남아 있다고 해도 글로벌 화주(貨主)의 신뢰를 잃어 일감을 따내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진해운의 핵심 자산 중 하나인 미국 롱비치터미널의 경우 최대주주가 세계 2위 선사인 스위스 MSC로 사실상 넘어갔고 알짜 노선인 미주노선 영업권은 SM그룹에 매각됐다. 스페인 알헨시라스터미널은 현대상선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이 같은 핵심 자산을 제외하면 한진해운에 남은 자산은 광양·경인터미널, 미국 뉴저지·애틀랜타 및 부산 사옥 정도가 정부다.
파산법 전문인 한 변호사는 “회계법인 실사 결과 한진해운의 청산가치는 1조7,900억원으로 산정된 반면 계속기업가치는 산정조차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해운업은 제조업과 달리 일방적으로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거래 상대방이 있어야 하는데 현 시점에서는 신뢰를 상실해 영업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소형 선사로 명맥 유지한 뒤 차기 정권에서 전방위 지원이 해법=다만 아직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다. 금융논리만 따지면 ‘빚잔치’ 이후 청산이 일반적인 절차지만 한진해운에는 아직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적 자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진해운에는 200여명의 직원이 회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해운이 내년 2월5일까지 근해 중심으로 영업하는 소형선사로 거듭나는 내용의 회생계획안을 제출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미약하지만 회생의 가능성도 남아 있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인터미널의 경우 매입 수요가 없어 매각이 어려운 상황이고 소형 선박은 용선료가 저렴하고 물건도 많아 임대가 어렵지 않다”며 “한진해운이 어떤 식으로든 명맥은 살릴 수 있는 길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정책적 지원에 대한 역량 부족이다. 한진해운을 문 닫게 한 현 정부가 다시 회생의 길로 키를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책실패를 자인하는 것일뿐더러 현재 정치 지형에서는 이러한 정무적 판단을 내릴 컨트롤타워가 없어 누구도 책임을 지기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다.
설령 정부가 한진해운을 되살릴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조(兆) 단위 공적자금을 퍼부어야 한다. 하지만 탄핵 정국 속에서 정부가 의지를 갖고 지원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방법은 한진의 생명줄을 다음 정권까지 유지한 뒤 차기 정권에서 강력한 의지를 갖고 특단의 회생책을 내놓는 방법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내년 대선에서 한진해운을 반드시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가 등장해 전방위적 지원을 퍼부어야 한진해운의 회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가정법이 현실화한다고 해도 한진해운이 과거와 같은 세계 7위권 선사로 재도약하기는 기적에 가깝다. 외환 위기 직후 구조조정 실무를 담당한 한 전직 고위 관료는 “구조조정은 현재 그림만 보면 항상 금융 논리에 집착하고 결국 문을 닫는 쪽으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며 “지금이라도 산업적 큰 틀을 다시 한번 설계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서일범·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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