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정치권이 내년 상반기 예산 조기 집행에다 1·4분기 추가경정예산 편성 카드까지 검토하고 나선 것은 우리 경제가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추경은 정부의 기존 예산으로는 경기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사실상 마지막 수단이다. 정부 재정의 틀을 흔든다는 점에서 국가재정법상 편성 요건이 까다롭고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웬만해서는 잘 꺼내지 않는다. 정부가 제한적인 수준에서 추경을 편성하는 이유다.
특히 1·4분기 추경 편성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통상 정부는 경기하강에 대응하기 위해 예산을 상반기에 당겨쓰고 하반기에 부족한 세입과 세출을 보충하기 위해 추경을 편성한다. 이 때문에 추경은 보통 3·4분기 이후 편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4·4분기 이후로 늦어질 경우 그다음 해 예산안과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과거에도 1·4분기 추경은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편성된 사례를 찾기 어렵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1980년대 이후 1·4분기에 추경이 편성된 사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8년 2월, 199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맹위를 떨치던 2009년 3월 등 단 세 차례뿐이다. 기재부 예산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외부 쇼크로 1·4분기에 추경을 편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위기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정부는 비단 1·4분기 추경 편성뿐 아니라 국가 재정을 연쇄적으로 동원해 경제위기 확산에 대응했다. 1998년 2월 12조8,000억원의 추경을 편성한 데 이어 같은 해 7월 12조2,000억원을 추가 편성했다. 이도 모자라 1999년 예산안은 당초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을 수정한 수정예산안까지 편성했다. 이듬해에도 정부의 돈 풀기는 계속됐다. 1999년 3월 2조8,000억원의 추경을 편성한 데 이어 같은 해 6월 2조7,000억원을 또 편성했다. 정부가 IMF 당시 추경으로 편성한 정부 재정만 30조5,000억원에 달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IMF 때보다 횟수는 줄었지만 규모 면에서 가장 화끈한 추경 편성이 이뤄졌다. 먼저 2008년 6월 4조6,000억원으로 대응하고 다음해인 2009년 3월 역대 최대인 28조4,000억원의 자금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당시 추경 편성 작업에 참여했던 기재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IMF 때의 경험을 기초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선제 대응과 충분한 규모에 초점이 맞춰졌다”며 “정부의 과감한 결단으로 여타 국가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재정학자들은 추경의 정책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선제 대응, 확실한 신호, 충분한 규모 등 3박자를 필수요건으로 꼽는다. 특히 추경의 적절한 편성 타이밍을 놓칠 경우 경기 대응은 실기하고 재정은 재정대로 소모해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추경이 대표적인 예다.
정부는 유일호 경제팀이 출범한 올 1·4분기 재정절벽·소비절벽으로 경기 하방 압력이 커질 때도 추경 편성보다는 재정 조기 집행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추경보다는 가용한 재원을 미리 당겨쓰는 예산 조기 집행이라는 무난한 방법을 선택한 대가는 컸다. 하반기 소비절벽과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 우려 등으로 경기가 또다시 급랭하면서 11조원 규모의 추경을 결국 편성하게 됐다.
추가 국채를 찍지 않고 올해 들어 더 걷힌 세수를 활용한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었지만 경기 하강을 방어하기 위한 충분한 규모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결국 정치권이 먼저 내년 1·4분기에 추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 일단 추경 편성을 위한 여건은 나쁘지 않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0% 이하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최상위권이다. 올해 부동산 양도세 등의 호조로 세수가 잘 걷혀 재정의 여유도 있다.
정부는 일단 정치권의 요구에도 재정 조기 집행률을 58%(배정은 68%)까지 올려 정해진 예산을 풀가동하고 추경 편성은 내년 1·4분기 경기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1·4분기 경제성장률은 내년 4월27일에 발표된다. 이는 정치권에서 거론하는 2월과는 시차가 크다. 물론 1·4분기 성장률 공식 발표 이전에라도 다른 지표로 경기 하강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다가는 적절한 추경 편성 타이밍을 또 놓치는 실기를 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종=김정곤기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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