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한 폭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쌓여 있다. 젊은 작가 허수영의 이른바 ‘1년’ 시리즈다. 봄에는 피어나는 싹을 그리고 여름에는 그 위에 무성한 잎을, 가을이 오자 울긋불긋한 덧칠로 단풍을 그리고서는 겨울에 이르러 눈을 그렸다. 이렇게 한 화면에 사계절이 누적됐고 숱한 밤과 낮이 쌓였다. 이 그림은 마침 작업을 끝마친 시점이 겨울이어서 꼭 지금 같은 설경(雪景)이 됐다. 여러 레지던시를 돌아다닌 작가는 “잦은 이동은 낯선 곳에 도착하고 정들고 떠나고의 반복”이었다며 “그러다 보니 머무는 곳에서, 머무는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내게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업실 주변 풍경들을 거듭해서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나 자신이 파고들 틈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린다”는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앞서 그린 그림을 지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작가의 개인전이 내년 1월8일까지 열린다. 그림 하나를 1년 이상, 수년씩 붙들고 있다 보니 최근 3년작을 다 모았음에도 16점뿐이다. 양보다 질이라, 2m 이상의 대작들을 파고들수록 볼거리가 솟아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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