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대통령제의 실패가 아니라 리더십과 제도 운영의 실패입니다.”
김호진 고려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최순실 사태와 그로 인한 촛불집회를 지켜본 소감을 이같이 요약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의 저자로 역대 대통령의 공과를 연구해온 저명한 원로 학자다.
올해 19대 대통령선거는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평가했다. 김 교수는 “지난 1987년 민주화 이후 ‘박정희 패러다임’은 청산된 듯 보였지만 잔재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며 “박근혜 대통령을 끝으로 우리 사회의 박정희 패러다임은 완전 종식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정치적 유산을 계승한 박근혜 대통령이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흔적들을 지우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김 교수는 “‘박정희 체제’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독재 투사형 대통령들이었지만 각각의 문제가 발생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실용형’이 뽑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 시대에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하던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한 ‘토목공사형 실용’의 한계가 뚜렷했다.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부터 아버지의 유산에 기댔다. 김 교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한 표라도 줘야 한다는 감성투표에 의해 당선됐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근대화·산업화를 위해 유신독재는 해도 된다는 식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식 한계를 못 벗어났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문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노력을 다해왔다”며 공익을 위해서는 ‘최순실 국정농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이끌 대통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김 교수는 “강력한 지도자”라고 답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표현한 ‘강력함’은 권력을 휘두르는 형태가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는 ‘강력함’이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로 오해되고 있다”며 “리더십과 경륜·국제정세를 꿰뚫는 경쟁력 등을 갖고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로 해석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명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는 김 교수가 꼽은 능력 있는 지도자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말 프로이센의 총리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세계 최초로 근대적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등 정치·경제·사회·외교 등 각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김 교수는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정책으로 승부하는 인물이 중요하다”며 “포퓰리즘이 아닌 정책을 제시해야 하고 이념적으로 편향적이 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개헌 논의가 시작된 것에 대해서는 “현 대통령제에 대한 실험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만으로 대통령제를 바꾸기에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과 정보기술(IT) 산업 기반 마련에 성과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도 실패한 대통령은 많이 나왔지만 그때마다 개헌을 하자는 얘기는 안 나왔다”며 “개헌을 안 하겠다는 정치인도 정치적 계산에 의해 말한 것이겠지만 현재 제도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정략적인 발상에서 발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그로 인해 촉발된 촛불집회를 본 뒤 김 교수는 희망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들이 엄청난 정치교육을 받은 것”이라며 “어떤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을 뽑았을 때 이렇게 된다는 깨달음이 생겼으니 다음 대선은 이번 실패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콤플렉스가 역대 대통령의 통치스타일 만들었다”
■김호진 교수 저서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으로 본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
김호진 고려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에서 역대 대통령의 콤플렉스가 어떻게 리더십으로 승화돼 대권까지 이어졌는지 흥미롭게 설명했다.
그는 저서에서 “어릴 적부터 가난의 한, 약자의 한, 서자의 한을 품고 자란 사람은 소외의 설움을 보상받기 위해 성취의 욕망을 키운다. 이 욕망이 권력의지와 결합하면 대권을 잉태했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콤플렉스와 리더십 스타일을 갖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양녕대군의 후예라는 우월의식과 가난한 현실의 박탈감이 얽히며 ‘가부장적 권위형’ 리더십을 완성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였다는 친일, 남로당 가담 경력 등으로 사상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것으로 분석됐다. 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의 콤플렉스를 보상받으려는 권력 동기가 유신독재의 시발점이 됐다고 봤다. 김 교수가 평가한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은 ‘교도적 기업가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복합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소유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상적·진보적이었던 김 전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아들인 것을 ‘거래형 리더십’으로, 정적들을 포용한 것을 ‘관용의 리더십’으로, 작은 국정까지 직접 챙기는 모습을 ‘완벽주의 리더십’으로 표현했다. 다만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을 주입하는 경향이 강해 ‘계몽적 설교형’의 특성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진 ‘탈권위적·원칙주의 리더십’은 그에게 양날의 검이 됐다. 김 교수는 탈권위적인 모습에 대해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를 전근대적 수직형에서 근대적 수평형으로 바꿨다”고 평가하면서도 “스스로 희화적인 인물이 됐고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리더십으로 비쳤다”고 지적했다. 원칙주의에 대해서는 “혼탁한 정치무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지만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일이 없고 지역감정을 이용하지도 않았다”고 봤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독선’으로 이어진 것이 한계였다.
이 밖에 김 교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저돌적 해결사형’ △노태우 전 대통령 ‘소극적 상황 적응형’ △김영삼 전 대통령 ‘공격적 승부사형’ △이명박 전 대통령 ‘개척시대의 창업가형’으로 리더십 유형을 정의했다. /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He is △1939년 안동 △1955년 안동사범학교 △1964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1972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1974년 미국 하와이주립대 정치학 석·박사 △1983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1994년 한국정치학회장 △1999년 노사정위원장 △2000년 제17대 고용노동부 장관 △2005년 세종대 이사장 △고려대 행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