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한 분위기가 나라 전체를 감싸고 있다. 국내외 환경이 만만치 않은 까닭에 이 같은 답답함과 불확실성이 언제쯤 가시게 될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한 경제 및 정치 문제를 헤쳐나가는 일은 고등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자연으로부터 배우면 된다. 자연을 보라. 그곳에는 끊임없이 부침이 이뤄지고 있다. 옛것은 사라지고 쉴 새 없이 새것이 등장한다. 자연계에 속한 그 어떤 생명체도 변화로부터 성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바로 거기에 개인과 조직과 사회가 살길이 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변화하는 것 자체는 받아들이면 된다. 거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이왕 변해야 한다면 쫓기듯이 하지 말고 압박을 받아서 마지못해서 하지 말고, 스스로 미리미리 변하면 된다.
이런 평범한 진리를 거부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어려움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마치 강 하구의 토사가 쌓여가듯이 비효율과 고비용이 구조적인 문제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없애야 하는 것들이 도처에 쌓이지만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절에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기관·조직·제도·정책·관행·관습 등이 우리 사회를 점점 꼼짝달싹할 수 없이 옥죄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의 것들에 기대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변화에 완강함을 보인다. 소수의 저항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수의 이익과 나라의 앞날은 그들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근래에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안타까움이다. 삶 자체가 변화인데 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일까. 세상만사에 건너뛰는 법은 없다. 거부의 대가는 가혹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적시에 변화하지 못하면 사람이 얼마나 큰 비용을 지불하게 되는지를 깨우치게 된다. 이런 진실은 개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사회가 그때 꼭 필요한 변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후에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겠는가. 먼 나라 역사를 가져올 필요 없이 우리의 근현대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왕 변해야 한다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기꺼이 변화를 시도할 수 없을까. 눈을 감는다고 해서 변화하지 않고서는 헤쳐나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 버리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큰 위기는 한 번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라를 뒤흔들고 곡소리를 만들어내는 위기는 동네방네 외치면서 요란스럽게 오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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