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수장들이 미·중 통상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광폭의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우리 기업 수장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발이 꽁꽁 묶인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과의 갈등에 양국 간 사업적 교류가 점점 가로막히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트럼프 측과의 인맥도 찾지 못하고 있어 우리 기업들로서는 양대 시장(G2) 모두 네트워크가 단절된 위험에 처하게 됐다.
재계에서는 한국기업들의 경쟁력 상실을 넘어 자칫 글로벌 무대 변화 흐름에서 낙오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국 대통령이 오는 20일 취임하는 것을 앞두고 글로벌 기업 수장들은 광폭 행보에 나서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중국과 멕시코에서 생산돼 미국에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35% 이상의 고율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 섞인 으름장을 놓자 선제적인 대응조치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삼성을 포함한 우리 대기업 그룹 총수나 오너들은 특검 수사, 헌재 심리 등에 발이 묶여 글로벌 비즈니스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민간 차원의 ‘비즈니스 외교’가 사실상 중단됐다.
실제 많은 기업 오너와 총수들의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보스 포럼 등에 주빈으로 초대를 받았지만 출국금지 조치로 참석이 불가능한 상태다. GM·도요타·피아트크라이슬러·소프트뱅크·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들이 ‘기업 때리기’에 한창인 트럼프 당선인의 행보를 의식해 경제외교 행보를 넓히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해외 거점을 돌아다니며 신성장동력 마련을 위한 기업 인수합병(M&A)과 시설투자, 해외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등에 나서야 하지만 지금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에 더해 국회는 재벌개혁을 기치로 경영권을 되레 옥죄는 법안을 양산하고 있어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라고 토로했다.
10대 그룹의 또 다른 임원은 “각종 국제 전시회 등에 참석해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 분야를 확대하고 새로운 경영전략도 구상해야 하는데 너무나 안타깝다”며 “혹독한 외풍(外風) 때문에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시대를 맞아 우리 기업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세제혜택이 좋은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고 공장 규모와 생산품목에 대해서도 내부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실제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출되는 삼성과 LG전자 세탁기에 각각 52.5%, 32.3%의 반덤핑 예비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한국 세탁기에 대해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현대차도 고민이 깊다. 트럼프 당선인이 도요타의 멕시코 신설공장 계획을 반대해 무산시킨 것처럼 언제든지 화살이 한국 완성차 업체를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무부와 접촉을 갖고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에 대해 설명을 듣고 우리 기업의 입장을 전달해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지난해 1조원을 들여 멕시코 공장을 지은 기아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생산량의 80%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수출할 방침이지만 도요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전면에 나서줘야 할 경제단체마저 발이 묶여 있다는 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자신들의 조직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이고 회장과 부회장의 수장 자치도 사실상 공백 상태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다른 경제단체들 역시 민간 외교에 나서려면 정부와의 유기적 협조 체제가 이뤄져야 하는데 불가능한 형국이다.
/서정명기자 vicsj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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