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부장판사의 칼럼 하나가 연일 화제입니다.
부장의 입장에서 ‘대한민국 모든 부장’들의 ‘꼰대질’을 에둘러 비판하고 나선 부장판사의 용기에 세대를 막론하고 “사이다 같은 발언”이라며 찬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죠.
저희 회사에서도 이 칼럼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부장·차장이 없는 평사원만의 ‘카톡방’에서 부장판사의 글이 공유된 후, “이런 부장을 모시고 일을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부터 “왜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부장이 없는 것이냐”며 자괴감을 보인 글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대화창을 장식했답니다.
직장인의 삶에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젊은 직원들은 저마다 ‘꼰대 구별 체크리스트’ 하나쯤은 가슴 속 깊이 품고 지냅니다. 저 역시도 그들 중 한 명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꼰대 구별 체크리스트’는 비교적 간단한 편입니다.
1.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100% ‘꼰대’
2. 대체로 ‘명령조’로 말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100% ‘꼰대’
3. 후배의 업적에 대해 칭찬보다 약점에 대해 언급한다면… 100% ‘꼰대’
4. “내가 너만 했을 때”를 입에 달고 산다면… 100% ‘꼰대’
5. 유명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의 인연을 자주 자랑한다면… 100% ‘꼰대’
6.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유난히 민감해한다면… 100% ‘꼰대’
7. 칭찬을 들어도 그 칭찬의 양과 질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100% ‘꼰대’
8.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친히’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주로 많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100% ‘꼰대’
9. 연애사나 자녀계획 같은 ‘사적인 이야기’에 방법을 제시해주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라면… 100% ‘꼰대’
10.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후배에게 두고두고 토라져 있는 사람이라면… 100% ‘꼰대’
이들 각 항목에 대해 저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10개 항목 중에서 7~8개에 해당한다면 전 그 사람을 ‘진정한 꼰대’라고 확신합니다.
얼마 전 인사 시즌을 거쳐 한 모 차장이 우리 부서로 이동했습니다. 부서 이동에 맞춰 엄청난 의욕을 불사르며 다른 차장들에게선 목격할 수 없는 ‘열린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더군요. 한 차장의 열정적인 모습에 저희 같은 젊은 직원들은 희망 반, 의심 반의 시선을 보냈죠. 이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2주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역시나 이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저녁 회식을 소집하더군요. 물론 ‘부장님을 제외하고’ 입니다. 부장판사가 경계하라고 했던 바로 그 ‘저녁 회식’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두가 주말의 열기에 흠뻑 취하는 ‘금요일 저녁 7시’를 콕!! 집어 회식 날짜로 못 박았습니다.
모두가 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했고, 금요일 저녁 7시, 직장인들이 밀집한 강남역 인근 모 고깃집에서 한 차장 주재의 회식이 시작됐습니다.
한 차장 : 우리 한 번 새롭게 이 부서를 바꿔 보자구. 부장도 그렇고, 본부장도 너무 ‘꼰대’잖아, 그치?
우리 : 아~ 아니에요. 저희는 정말 부장님이나 차장님들 덕분에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아…. 그냥 회식이나 하지 말아줘요. 제발… ㅜㅜ)
<그로부터 2시간 후>
한 차장 : (제대로 술이 오른 상태로) 야! 니들, 다 오늘 집에 갈 생각하지 마. 오늘 끝까지 달려보는 거야. 특히 너 김 대리. 저번에 보니깐 뭐 와이프가 아프고 어떻고 막 그러던데. 오늘은 그런 거 안 통하니깐, 딴 생각 하지마. 알았지?
김 대리 : 아…. 물론이죠. 차장님. 오늘은 차장님과 함께 하니 자리가 너무 즐거운데,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우리 : (아…. 불쌍한 김 대리님. ㅠ.ㅡ.ㅠ)
일말의 기대는 ‘역시나’!!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그랬던가. 술 취한 사람은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해 절대 ‘술 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신을 꼰대라고 인정하고 싶을까요?
마동석, 조진웅, 유재석 같은 친근한 ‘아재’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해 가면서 다른 ‘꼰대’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새로운 ‘꼰대짓’을 하고 있는 저들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청와대에서 ‘그분’이 느끼신 인간사의 자괴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내가 이러려고 이 회사 들어왔나” 하고 말이죠~
한 차장은 그래도 나은 ‘꼰대’에 속합니다. 꼰대 중에서는 상급이란 말이죠. 그나마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항변도 하고 눈치도 보는 편이니깐요.
문제는 사이다 같은 부장판사에 글에도 여전히 ‘극강 꼰대’들은 ‘꼰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죠.
송 부장 : 서경씨. 요즘 인터넷에서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라는 칼럼이 화제던데. 그런데 서경씨는 정말 좋겠어. 나는 그 글에 소개된 꼰대 부장이 아니잖아. 그치? 아하하하하!!!!!
이 서경 : (헉,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내색은 하지 못하고...)그럼요!! 부장님은 절대 아니죠!! 우리 부서는 정말 행복해요~~~(극한 아부ㅠㅠ)
송 부장의 착각에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고 있을 때쯤, 저 멀리 김 차장이 ‘씩씩’거리는 콧바람을 내며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김 차장 : 그 글 봤어? 서경씨? 아주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그딴 글을 쓰고 말이야.
이서경 : 네? 어떤 글 말씀이신지….
김 차장 :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인가 뭔가 하는 칼럼 말이야. 정말 웃기고 있어. 후배들 다 잘 되라고 충고하는 것도 이제 못할 것 같아. 이런 글 또 나올까 봐 무서워서 말이지. 아까 휴게실에서 다른 부서 대리들하고 사원들 그 글 보면서 ‘킥킥’ 거리고 있더라구. 그 앞에서 뭐 보냐고 하니깐 다들 ‘수군수군’대면서 ‘아니에요’ 하면서 도망가던데, 참나….너무 일반화한 거 아니야? 우리 때는 말이야, 선배가 건네주는 술 한잔에 인생을 배웠다고. 그게 나중에 보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걸 모르고 다들 거기에 동조하고 있으니 조직문화가 망가진다는 게 이런 거다 싶네.
이서경 :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차장님. 차장님은 그러신 분이 아니잖아요. 우리 부서도 그런 사례와 거리가 멀구요. 그냥 다른 데 얘기에요~(ㅠㅠ 흑흑 나는 오늘도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나는 이렇게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구나 ㅠㅠ)
그러고 보니 꼰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를 들킨 듯이 역정을 내는 건 30대 꼰대나 40대 꼰대나 50대 꼰대나 다 비슷했습니다.
진심어린 반성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부장판사의 ‘사이다 발언’을 보고, 적어도 스스로 반성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기대는 저희 평사원들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송 부장과 김 차장의 그날 발언 이후, 저의 ‘꼰대 구별 체크리스트’에는 항목 하나 추가됐습니다.
11. 자신의 ‘잘못’과 세간의 ‘평가’에 무조건 ‘No’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100% ‘꼰대’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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