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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인정(人情)으로는 안돼"

김희원 생활산업부 차장





연초부터 차량 접촉사고의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지루한 병동생활의 한 가지 활력소라면 같은 병실에 입원한 한 할머님이었다. 시종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는데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모습이 첫날부터 인상적이었다. 특별히 상대(上待)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하대하지 않았다.

유독 큰 목소리의 할머님은 알고 보니 국내 국악계를 대표하는 원로 중 한 명이셨다. 그 때문에 방문하는 손님들까지 모두 목청부터 남달라 본의 아니게 국내 국악계의 속사정을 귀동냥하기도 했다.

어느 날 오전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니 할머님이 격앙돼 있었다. 본인이 입원한 틈을 타 건강에 대한 악성 루머가 돌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여러 말로 위로하다 “어머님 이후가 준비돼 있지 않아 말들이 나온다. 퇴원 뒤 후계부터 하나하나 정해가야 한다”고 권했다. 이후에도 한참을 듣기만 하고 침묵하시던 할머님은 대화 말미에 입을 열어 딱 한 말씀을 하셨다. “인정(人情)만으로는 안 되네.”

사회 전반의 원칙과 질서가 무너지고 탈법과 봐주기로 국정까지 무너진 상황에서 할머님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일평생 한길에 매진하며 피를 토하는 노력과 갈고닦은 실력으로 오늘에 이르렀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듯했다.



영어에서 ‘원칙’이라는 단어는 공정함·옳음·우수함 등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단어는 비관용, 융통성 결여, 고집, 무정함 등과 연관된다. 원칙보다 통용이, 합법보다 탈법이 비단 정권 핵심부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음을 언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조기 대선까지 치르게 됐지만 사회 전반의 ‘정도(正道)’가 바로잡히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선후보군만 바라봐도 리더십 부재로 전통적 지지 기반을 잃고 정치생명의 위기에 몰렸던 야권 인사가 ‘여난(與亂)’의 최대 수혜주로 재부상해 본인의 것이 아닌 ‘역풍’으로 정권 교체에 도전하고 있다. 기존 정치권 껴안기에 나선 다른 인사는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인 서울 강남 3구 위주의 부동산 정책을 답습해 그가 말하는 변화가 과연 무엇인지 갸웃하게 만든다. 선진국 금융위기라는 호기에도 신흥국 중심의 어떤 변화조차 이끌어내지 못한 다른 글로벌 인사는 되레 외교술을 강점으로 꼽으며 판에 가세했다 끝내 낙마했다.

후보군의 물갈이나 큰 폭의 정책 혁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국민이 원하는 변화의 수위가 이 정도라는 방증이다. 지지율이 요동한다면 정치는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많을 뿐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한 실체는 여전히 논의 밖이다.

국내 대통령선거는 일본 TV가 생중계에 나서는 아시아 최대의 정치 축제다. 지역 민주주의의 선도국답게 그간의 통례나 관습이 아니라 변화와 혁신에 기반을 둔 진정한 도약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퇴보한 민주주의를 재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이 스멀스멀 밀려옴을 부인하기 힘들다. 김희원 생활산업부 차장/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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