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왔으나 첩첩산중이다.’ 선박평형수 처리장치(BWMS; Ballast Water Management System, 이하 평형수 처리장치) 이야기다. IMO(국제해사기구)가 주도한 선박평형수관리협약이 지난해 9월 비준될 때만 해도 국내 업계는 새 시장 창출을 기대하며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기도 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에 부딪히고 있다. 세계 선주들의 반발, 유럽· 일본· 중국업체의 맹추격, 전 세계적으로 휘몰아치는 자국 산업 보호주의 등 예기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점유율 절반을 차지했던 국내 업체가 앞으로 5년간 40조 원으로 추정되는 신규 시장에서 아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늘어가고 있다.
선박평형수의 해양 생태계 교란
세월호 참사 이전까지만 해도 선박평형수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했던 용어였다. 선박의 무게 중심을 낮춰 균형을 잡기 위해 탱크에 담는 바닷물이 선박평형수다. 선박이 항구에 도착해 화물을 실을 때 다른 해역에서 싣고 온 평형수는 배출하게 된다.
대형 컨테이너 선박의 경우 약 10만 톤의 평형수가 필요하다. IMO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국을 이동하는 연간 평형수는 약 100억 톤에 달하고, 이와 함께 약 7,000여 종의 해양 생물이 이동하고 있다. 이 해양 생물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오대호의 얼룩무늬담치와 호주의 검은줄무늬담치를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미국 오대호에 카스피해가 원산지인 얼룩무늬담치가 출현, 왕성한 번식력으로 호수의 수도관을 막았고, 토종 홍합까지 몰아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98년 평형수를 통해 호주 북부 해안에 들어온 검은줄무늬담치는 진주양식장을 파괴했다.
세계 각국은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고, IMO는 2004년 평형수 안의 수중생물과 미생물을 제거 또는 살균처리 하기 위한 선박평형수관리협약을 체결했다. 모든 국제 항해 선박에 평형수 처리장치 탑재를 의무화한 것이다. 이 협약은 12년 만인 지난해, 회원국 30개국 이상의 비준과 비준국 선복량의 전세계 선복량 35% 이상 달성이라는 발효 요건을 충족시켰다. 이 협약은 유예기간 1년을 거쳐 올해 9월 8일부터 정식 발효될 예정이다.
40조 원 규모의 신규 시장
신규 건조 선박의 경우 2009년부터 평형수 처리장치를 절반 가까이 탑재해왔기 때문에, 협약 발효 이후엔 기존 국제 항해 선박 6만 8,000척이 새로운 시장이 될 전망이다. 이중 선령이 15년 넘은 선박 등을 제외하면 약 5만 척이 평형수 처리장치 탑재 대상 선박으로 추정된다. 선박들은 처음 도래하는 국제오염방지설비 정기검사 전까지 처리장치를 탑재해야 한다. 이 정기검사는 주기가 5년이기 때문에 2022년이 설치가 허용되는 마지막 해가 된다.
평형수 처리장치의 가격은 선박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살균 처리 방식에 따라 달라지지만, 평균 40만 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년 전엔 50만 달러를 호가했지만, 최근 장치 업체가 증가하고 가격 경쟁이 심해지면서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설치 비용은 장치 가격의 70% 정도로 보면 된다. 선박 당 평형수 처리장치를 탑재하려면 평균 68만 달러 가량이 소요되는 셈이다. 향후 5년간 기존 선박의 처리장치 및 설치 시장 규모가 약 40조 원(=50,000척×680,000달러×1,170원)이 될 것이란 계산은 이런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평형수 처리장치 기술력 1위
한국의 선박평형수 처리장치 기술력은 현재 세계 1위다. 지난해 10월 기준 IMO가 최종 승인한 41개 선박평형수 처리장치 중 16개 장치(39%)를 국내 업체가 보유하고 있다. 일본이 9개, 독일이 6개, 노르웨이가 3개, 중국이 2개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테크로스가 2008년 국내 최초로 IMO 최종 승인을 받은 후, 엔케이, 파나시아,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STX중공업, 삼건세기, 아쿠아이엔지, 케이티마린, 한라IMS, 선보공업 등이 잇달아 평형수 처리장치 업체로 등록을 했다. 업체 수로 보면 11개 업체다. 국내 업체는 전기분해, 자외선투사, 화학약품처리, 오존방식 등 현존하는 기술을 모두 갖추고 있다.
유럽·중국·일본의 맹추격
평형수 처리장치를 판매하기 위해선 IMO 최종 승인과 자국 정부 승인 외에도 미국해안경비대(USCG)의 형식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해안경비대는 현재 IMO 기준보다 훨씬 강력하고 까다로운 승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 외래수중혐오생물방지 및 제어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지난 2012년에는 IMO 선박평형수 배출 처리 기준보다 훨씬 강도 높은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2013년부터 형식 승인을 위한 테스트를 시행해 왔고, 그 이후엔 임시적인 AMS(Alternative Management Systems) 인증을 부여해 2018년까지 형식 승인 기간을 유예해주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미국 외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유럽 업체들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 노르웨이 옵티마린이 세계 최초로 형식 승인을 받은 데 이어, 오션세이버(노르웨이)와 알파라발(스웨덴) 등 3개 업체가 이 시장을 선점했다. 노르웨이는 2014년 미국해안경비대가 처음으로 인정한 타국 독립시험기관도 갖추고 있다.
국내의 경우 노르웨이보다 한해 늦은 2015년, 한국선급 컨소시엄이 독립시험기관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내 6개 업체가 형식 승인 시험을 받고 있다. 이르면 올 상반기부터 삼성중공업을 필두로 잇달아 승인을 받을 예정이다. 그럼에도 유럽 업체에 비해선 한발 늦은 상황이다.
이 외에도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가 무서운 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은 업체 수만 19개다. 대부분 최근 2년 내 설립된 업체로, 기술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저가 공세를 펼치며 무서운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에 일본의 추격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았던 기술력에서 일취월장, 가격 대비 성능 면에서 한국 업체를 추월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선주들의 반발 ‘2년 유예해 달라’
해운업계가 불황의 늪에 빠진 가운데 선주들의 볼멘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평형수 처리장치를 탑재하기 위해선 선박 당 평균 80만~100만 달러에 달하는 추가 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선주들의 설치비용 추정치는 장치 업체의 예상보다 높다).
이 같은 불만의 목소리는 해외에서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IMO의 해양환경보호위원회에서 라이베리아 해양 당국은 대상 선박 수에 비해 승인 기준에 부합하는 평형수 처리장치가 턱없이 부족하고, 장치를 장착할 도크 수도 모자라기 때문에 설치를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수 선박의 정기검사가 몰리는 시기인 2020년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맞섰고, 그 결과 올해 7월 열리는 해양환경보호위원회에서 처리장치 탑재 의무 기간을 2년 유예할 것인지 최종 결정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한국선주협회의 한 관계자도 “최근 미국해안경비대의 형식 승인을 3개 업체가 취득했지만, 그 승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한 조건이 많이 붙어 있다. 고가의 장비를 설치하고도 일부 항구에 입항조차 못하는, 자칫 절름발이 장치가 될 수 있다”며 처리장치 승인 시스템이 안정화될 때까지 설치 유예를 해야 한다는 기대를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선주들은 해양환경오염과 생태계 교란 방지라는 대의명분엔 공감하지만, 세계 물동량 감소로 인해 휴업 중인 선박도 많은 상황에서 고가의 선박평형수 처리장치 설치 비용은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거세진 자국산업보호
국내 소유 선박은 1,000척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평형수 처리장치 업계는 해외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등장, 영국에 이은 유럽 국가의 EU 탈퇴 움직임 등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이기주의의 바람이 거센 상황이다. 평형수 처리장치 산업도 이 같은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체적으로 해외 분위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 선박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유럽은 전통적으로 타 대륙보다 유럽 기술과 제품을 선호하는 문화가 강한 지역이다. 사드 배치를 이유로 전기차 배터리, 화장품, 한류 등 한국 제품에 보복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도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자국의 평형수 처리장치 산업 보호 측면에서 한국 설비에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일본도 자국 처리 장치에 유리하도록 관련 규제 정비를 추진하거나, 조선 및 기자재 업체와 선주 단체를 통해 자국 장치 사용을 유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시장점유율 절반 고수할 수 있을까?
국내 평형수 처리장치 업체는 최근 7년간(2010~2016) 세계 시장 4조 230억 원 중 1조8,396억 원을 수주해 연 평균 수주 2,628억 원과 시장점유율 45%를 기록했다. 해양수산부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평형수 처리장치 올해 수주액 목표를 3,000억 원, 2020년은 1조 원으로 제시했다.
올해 목표는 지난해 다소 저조했던 실적(1.396억원)을 고려해 평년 수준을 회복하는 선에서 잡았고, 평년의 4배 가까이 되는 2020년 목표도 5년간 폭풍 성장할 수요(40조 원)를 감안하면 매우 낮게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대외 환경이 예년과 달라지고 있음이 이 수치에 어느 정도 담겨 있는 셈이다. 해양수산부는 3년 전 세계 시장 규모를 80조 원이라고 예상했다가 슬그머니 절반인 40조 원으로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2013년 한국선박평형수협회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13개 회원사 중 3개사가 이미 협회를 탈퇴했다.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STX중공업을 시작으로 화승R&A와 광산이 평형수 장치 사업을 접었고, 또 다른 한 개사도 사업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기술 개발 투자와 별도로 IMO 승인 15억 원, 미국해안경비대 형식 승인 30억 원 등 설비 인증에 필요한 초기 투자가 중소기업에겐 큰 액수인데다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상황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5년 간의 특수 후 연간 1조 원대로 시장이 축소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선박평형수협회 김성태 회장은 “큰 시장이 열리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점점 상황이 녹록지 않아지고 있다는 것도 체감하고 있다. 고객인 선주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고 전제한 뒤 “오랫동안 쌓아온 노하우·기술력을 앞세워 제일 규모가 큰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기자재 산업 중 유일하게 압도적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선박평형수 처리장치 산업이 모처럼 찾아온 특수를 맞아 어떻게 돌발 암초들을 극복하며 비틀거리는 조선업의 ‘희망 촛불’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홍덕기 객원기자 beaba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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