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길어지면서 소비행태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경기에 민감한 휘발유 소비는 4년 만에 줄었고 유통업계에서도 초대용량과 초소량 제품이 함께 늘어나는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합리적인 결혼식도 확산돼 결혼식 비용을 100만원으로 책정한 곳이 등장했다. 제조업의 불황과 높은 실업률 등으로 지난해 가구소득 증가폭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지출 역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결과다.
가성비를 먼저 따지는 소비자들의 증가로 백화점 등 전통적인 유통업체가 고전하는 가운데 초저가 라이프스타일숍만 나 홀로 호황을 맞고 있다. 다이소로 시작한 이른바 천원숍들은 버터·리빙도쿄·미니소·플라잉타이거 등 국내외 대형 생활용품숍들이 ‘초저가’를 내세워 대거 뛰어들면서 유통업계의 불황형 신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997년 1호점을 시작한 다이소는 지난해 1조5,000억원 매출을 달성하며 이날 현재 1,152개 매장을 기록했다.
결혼식도 소박해졌다. 연예계 톱스타 커플 비·김태희도 성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이들의 결혼식 비용은 130만원 정도로 알려지는 등 불황이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결혼문화까지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럭셔리웨딩의 본거지인 호텔들도 결혼식 하객 수를 20~30명으로 소규모화한 웨딩 패키지를 선보이며 이 같은 트렌드에 합류했다. 이비스스타일앰배서더 서울강남은 ‘비긴 유어 스토리’라는 웨딩 프로모션에서 20~30인 기준의 미니 웨딩 상품을 선보였다. 7코스의 식사를 포함하며 가격은 인원에 따라 140만~210만원이다.
불황은 콧대 높은 명품업계도 변화시켰다. 불황의 역풍을 맞은 명품업계는 이색 컬래버레이션으로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컨설팅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명품 브랜드 매출 규모는 2,734억달러(추정치)로 2009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에 색깔이 전혀 다른 업종과의 협업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해 이탈하는 고객 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올해 처음 루이비통은 ‘뒷골목 패션’으로 불리는 중가 캐주얼 ‘슈프림’과 손잡고 스스로 몸을 낮춰 골목으로 나왔다. ‘영’한 이미지를 입혀 젊은 층 끌어안기에 나선 것이다. 버버리 역시 2월 콜렉션을 선보이며 영국 조각가 고 ‘헨리 무어’ 재단과 협업해 고루한 버버리 체크를 던지고 자유롭고 아방가르드한 새로운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화장품업계도 바뀌고 있다. CJ올리브네트웍스가 운영하는 헬스앤뷰티 스토어 올리브영(www.oliveyoung.co.kr)이 지난해 4·4분기 매출을 분석한 결과 대용량 화장품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농심 켈로그는 1회 제공량 40g짜리를 개별 포장한 ‘스페셜K 스페셜팩’을 출시했다. 오리온도 ‘초코파이정’ 등 인기 파이 3종을 2개들이 소포장 제품으로 선보였다.
불황으로 적금을 깨는 사람도 늘고 있다. 2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 예적금 가입자 3명 중 1명 이상이 중도해지를 선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국내 은행의 예적금 중도해지율은 35.7%로 전년 대비 2.3%포인트 증가했다. 예적금 중도해지율은 전체 연간 해지 건 가운데 만기 이전에 중도해지를 선택한 건의 비중이다. 최근 오르는 추세로 2014년 33.0%에서 2015년 33.4%로 상승한 후 다시 35.7%를 기록했다.
건수로는 예적금이 약 1,053만건으로 이 중 예금 611만건, 적금은 442만건이었다. 해지율은 적금(40.8%)이 예금(33%)보다 높다. 보통 가계 사정이 어려워질 때 서민들은 보험부터 정리하고 이후 펀드나 예적금을 깨는 것으로 보는데 이제는 불황의 깊은 골로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된 것으로 풀이된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부쩍 줄어 휘발유 소비량이 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한국석유공사와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45만5,000배럴 줄어든 605만6,000배럴(7.0%)을 기록했다. 2013년 2월 8.0% 줄어든 후 4년 만에 감소폭이 가장 컸다. 휘발유 소비량은 지난해 8월 703만배럴로 최대치를 기록한 뒤 줄곧 감소세를 보이며 600만배럴 붕괴가 눈앞에 다가왔다.
휘발유뿐 아니라 경유와 등유 소비량도 큰 폭으로 줄었다. 트럭 등 주로 수송용으로 쓰여 서민 가계에 부담으로 직결되는 경유 소비량은 지난달 1,232만3,000배럴로 지난해 같은 달(1,353만2,000배럴)보다 8.9% 줄었으며 등유 소비량 역시 287만배럴로 같은 기간 19.9% 감소했다. 석유협회 관계자는 “휘발유 가격 상승 요인도 있지만 불황에 따른 민간소비 위축의 영향으로 차량 운행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식음료업계에서는 제품 크기가 양극화되고 있다. 사이즈 조절에 골몰하며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돌코리아는 기존 제품 대비 3분의1 크기의 작은 한입 사이즈인 ‘미니트리플바’를 내놓았다. 대용량 출시도 많다. 여러 번 나눠 쓰고 싶어하는 알뜰한 소비자를 겨냥했다. 일반 소형 요구르트(60㎖)와 비교해 12배 이상 많은 서울우유 750㎖ 오렌지 요구르트, 1.5ℓ ‘미에로화이바 패밀리’, 롯데칠성음료의 ‘칸타타 390㎖’가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새 기록을 세우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살림살이가 팍팍하다 보니 ‘한방’을 노리는 심리가 확산되며 로또 판매량도 급증했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 판매량은 3조5,5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전년보다 8.9% 늘었다. 물론 경제가 팽창하고 소득이 많아지면 로또 판매량도 늘기 마련이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다. 지난해 경상성장률(약 4%)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증가했다.
실업이 늘자 당장 먹고 사는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묻지 마 창업’에 나서면서 자영업자는 급증했다. 1월 현재 전국 자영업자는 547만6,000명으로 1년 사이 16만9,000명이나 늘었다. 증가폭은 2012년 7월(19만6,000명) 이후 4년6개월 만에 최대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자영업자가 몇 년 사이에 줄어들었지만 최근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자가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며 다시 반등하고 있다”며 “정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근로자 중 자영업자의 비중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정된 파이를 ‘치킨집’ 등 저부가가치 자영업자가 나눠 먹었기 때문이다. /심희정·박성호기자 세종=이태규기자 yvett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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