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특검의 수사가 끝나는 대로 3월 초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각 계열사 이사회와 전문경영인 중심의 경영체제 도입을 선포한다. 미전실과 비슷한 별도의 컨트롤타워를 만들거나 컨트롤타워를 주력 계열사에 쪼개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 수준에 걸맞은 계열사별 자율경영에 나서는 것이다.
이는 ‘오너=삼성’이라는 과거의 중앙집권적 재벌 경영체제를 버리고 계열사 전문경영인이 책임지고 기업을 끌고 가는 일종의 지방자치제를 도입하겠다는 의미다. 삼성은 ‘오너→미전실→전문경영인’으로 이어지는 톱다운 방식의 경영을 79년간 유지해왔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28일 특검 수사가 끝나면 이르면 이번주 내 △미전실 해체 △수뇌부 동반퇴진 △이사회 중심 계열사 자율경영체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쇄신안을 공표할 예정이다.
삼성이 미전실을 대체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지 않고 계열사별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오너 중심에서 벗어나 글로벌 초일류기업다운 경영 시스템으로 전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이 방식이 영속적인 것인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에 따른 임시방편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평소 이 부회장이 이사회 중심 경영에 관심이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성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시도하려 함은 분명하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등기이사에 올랐고 글로벌 기업들의 이사회 중심 경영 기법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삼성의 전문경영인들이 미전실의 통제 없는 자율적 경영환경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삼성 각 계열사 사외이사들의 전문성도 높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삼성에 따르면 미전실 해체와 수뇌부 퇴진이 예고된 가운데 삼성 각 계열사들은 삼성그룹의 새로운 경영 방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다만 현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미전실을 대체하는 별도의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부분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삼성은 당초 미전실을 해체할 경우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의 전사지원조직을 키워 이들이 다른 연관 계열사를 이끄는 방식의 경영을 구상해왔다. 삼성전자 전사지원조직이 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 등 전자 계열사를, 삼성생명이 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증권 등 금융 계열사의 각종 경영 이슈를 조율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미전실처럼 ‘법적 실체’가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전사지원조직이 어떤 법적 근거로 삼성SDI나 삼성전기 등에 지시·통제를 할 수 있겠느냐”며 “전자·물산·생명이 여전히 삼성의 3대 축이 되겠지만 미전실처럼 다른 계열사를 직접 이끄는 역할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미전실과 같은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대신 각 계열사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강화할 방침이다. 주요 경영 안건에 이사들의 의견을 묻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 부회장은 평소 글로벌 기업들의 이사회 중심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이탈리아 피아트크라이슬러(FCA)의 지주회사 엑소르의 사외이사인 이 부회장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년 이사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삼성의 맏형인 삼성전자는 이미 이사회 의장 자격을 ‘대표이사’에서 ‘이사’로 확대해 사외이사도 이사회 의장을 맡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또 특검 수사로 지연되기는 했으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사외이사 선임도 추진하고 있다. 이사회 구성을 다양화하고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삼성의 ‘이사회 중심 경영’이 정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삼성전자만 해도 5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공학 전문가는 이병기 서울대 공대 교수가 유일하다. 다른 사외이사들은 대부분 정관계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미전실이라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태에서 삼성이 그룹 차원의 시너지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계열사 재편을 비롯해 그룹 전체의 인수합병(M&A ) 등을 주도할 전략팀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하만 인수 등을 통한 계열사별 시너지 확대 및 추가 M&A 등 그룹 차원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결국 다시 미전실과 같은 컨트롤타워를 만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있다. 이 부회장 재판이 마무리되면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이 TF가 미전실의 역할을 대행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삼성은 2008년 조준웅 특검 당시에도 전략기획실을 해체했지만 2010년 미전실로 부활시켰다. /윤홍우·신희철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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