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당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였던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이 돌연 잠적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우조선 지원에서 산업은행은 들러리였다”고 한 탓이다. 이 사건 후 AIIB는 한국 부총재 자리를 없앴다. 4조2,000억원을 내기로 약속하면서 확보한 부총재 자리가 날아간 것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을 검증 없이 산은 회장에 이어 AIIB 부총재로 앉히다 보니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무원칙의 폐해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일 중 하나가 인사다. 대우조선 부실 문제와 AIIB 사태에서 보듯 능력과 전문성 대신 낙하산 인사가 판을 치다 보니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대외 신인도까지 떨어지고 있다.
실제 공공기관과 금융권에 대한 낙하산은 도를 넘어섰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금융권 임원으로 온 낙하산 인사만도 무려 1,004명에 달했다. 사흘에 한명꼴로 낙하산 인사가 이뤄졌다. 홍 전 산은 회장도 능력보다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맺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승승장구했다.
문제는 전문성을 따지지 않은 인사가 많다는 점이다. 에너지 관련 이력이 전무한 최상화 전 춘추관장은 지난해 한국남동발전 감사에 선임됐고 조인근 전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도 한국증권금융 감사자리를 차지했다. 추가 지원 논란이 일고 있는 대우조선해양만 해도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임명된 사외이사 18명 중 10명이 정치권과 관련된 ‘정피아’다. 나눠먹기식 인사에 원칙이 끼어들 리는 없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관계자는 “우리 부처에서 담당하는 자리가 200개를 넘는데 3분의1은 청와대, 3분의1은 감사원을 비롯한 다른 부처, 나머지 3분의1은 우리가 임명한다”고 했다.
‘최순실 사태’는 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비선실세의 힘으로 장관직에 올랐다는 증언이 나왔고 송성각 전 콘텐츠진흥원장은 차은택씨의 추천으로 기관장을 맡게 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내 마음대로 인사를 할 수 있던 것은 과장급과 사무관밖에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최근 9년간 이뤄진 금융권 낙하산의 7.1%는 정치권 출신이다. 특히 정치권은 진보정권이냐 보수정권이냐에 따라 자신들이 추진하던 정책을 뒤집고 말을 바꾼다.
발효 5주년을 맞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때 타결된 한미 FTA로 2011년 1,292억달러였던 양국 교역액은 지난해 1,453억달러로 증가했다. 하지만 2012년 발효를 앞두고 옛 민주통합당 인사들이 “독소조항이 있다”며 비준을 반대했다. 보수정권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말을 바꾼 것이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그때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때 기획된 제주 해군기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국회선진화법도 같은 맥락이다.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선진화법 개정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고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은 손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원칙은 온데간데없다.
대선은 원칙 파괴를 부추긴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22조6,000억원 규모의 악성채무를 탕감해 203만명의 신용불량자들이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490만명의 생계형 부채 보유자들에 대한 신용대사면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의 기본원리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가볍게 보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노동무임금 같은 다른 원칙들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파업 때마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나서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강조해야 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원칙이 무너진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작은 원칙이라도 하나씩 지켜나가야 신뢰가 쌓이고 경제와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법질서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가 투명하고 안정되며 예측이 가능해진다”며 “불확실성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고 성장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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