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 ‘CES 2017’. 신기술의 향연장인 올해 CES의 주인공은 단연 자율주행차(AV)였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정보기술(IT) 업체, 스타트업 등은 단독 또는 협업으로 괄목할 만한 자율주행 신기술을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국내 대표 완성차 업체인 현대자동차 역시 ‘아이오닉EV’의 야간 자율주행 능력을 현지에서 전격 공개하며 제작기술력이 양산 직전 단계까지 올라왔음을 보여줬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운전석에 사람이 없어도 차가 스스로 알아서 장애물을 피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바꾸며 주행하는 미래 자동차의 시대가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점점 빨라지는 자율주행 기술 발전 속도를 지켜보는 보험업계의 마음은 편치 않다. 1~2년 전만 해도 완전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려면 50년은 걸릴 것으로 전망됐으나 최근 들어서는 오는 2020년이면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그만큼 자동차 기술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자동차보험을 다루는 손보업계는 작업을 더 서둘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기 전 자동차보험 가입이 필수인 것처럼 신기술을 장착한 자동차의 도로주행 전에는 이에 맞는 새로운 자동차보험 등장이 전제조건이다. 또 보험사가 새로운 형태의 보험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앞서 현행 일반차에 맞춰져 있는 법과 제도 정비, 손해배상 방식 등의 손질이 선행돼야 하는데 현재 국내에서는 정부와 법조계, 자동차 제조사, 보험사 등 관련산업 관계자들의 논의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달 24일 열린 금융위원회 금요회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진화하는 자율주행 기술을 보험상품에 적시 반영해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경쟁우위를 결정하는 핵심 역량이 될 것”이라며 보험업계에 자율주행차 시대에 대한 대비를 당부했지만 선제작업이 게걸음을 하는 상황에서 보험사가 대응 차원에서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돼 있다는 게 업계 반응이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사람의 개입이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사람이 탑승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행되는 자율주행차가 보편화 되기 위해서는 차량기술, 도로 인프라, 법규·제도, 사용자 수용성 등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이슈가 아주 많다”며 “자율주행의 기술개발 속도가 업계의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법적·제도적 준비작업을 더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에서 자율주행차 도입, 제도 마련과 관련해 모범사례로 주목하는 곳은 영국이다. 영국은 이미 2013년 정부가 자율주행자동차 시험운행을 승인하면서 동시에 자율주행 관련 기술 개발정책 마련에도 착수했다. 교통부를 주축으로 자율주행차 연구개발(R&D)에 2,000만파운드의 예산을 투입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보험업계, 법률 전문가, 제조업체 등이 모여 시험운행 규정을 마련하고 도로교통 및 의무보험 관련 규정을 차근차근 정비해나갔다. 현재 영국 정부는 로드맵상 자율주행차 양산 시점을 2018년, 사고책임과 의무보험 제도 등을 새로 규정한 법규 개정 완료시점을 2017년 여름으로 잡고 있다. 영국이 선(先) 제도 개선, 후(後) 기술 상용화의 모범사례로 주목받는 이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영국 정부와 자동차제조 업체, 보험사들의 협업이 부러운 이유는 단지 자율주행차 하나만이 아니다”며 “정부와 업계가 서로 신뢰하고 끊임없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모습 자체가 인상적”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업계가 자율주행 기술 발전을 보며 속 앓이를 하는 것은 제도 개편 등의 논의 지연 때문만이 아니다. 최근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CNBC와의 인터뷰에서 “자율주행차 산업은 보험산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듯이 자동차가 안전해질수록 자동차보험료는 내려가는 게 당연하고 궁극적 의미의 완전자율주행 시대가 열리면 운전자 과실 중심의 현행 자동차보험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쪼그라들 자동차보험 시장을 대신하기 위해 정보 파괴, 평판 훼손, 해킹 등 사이버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위험이나 또 다른 기술 등장에 따라 오는 신종 위험에 대응하는 보험상품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 역시 손실 관련 데이터 집적, 피해규모 측정 등을 각 보험사가 개별적으로 해나가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자율주행 기술 하나를 두고도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데 앞으로 쏟아져 나올 각종 기술과 리스크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캄캄하다는 지적이다.
보험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보험을 민간회사가 이윤 추구를 위해 판매하는 단순 금융상품으로 보면서 무조건 알아서 하라는 식은 곤란하다”며 “사회 각처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비하고 피해복구를 돕는 사회안전망이라는 시각을 전제로 당국과 각계 관계자들이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보험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하면서 변화에 대비하게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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