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R&D) 예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살수차처럼 ‘뿌려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천기술을 개발하려면 초기 투자비용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실패도 용인해야 하지만 일정 조건만 되면 돈을 주니까 너도나도 일단 돈부터 받고 보자는 식입니다.”
예산 당국의 한 관계자는 R&D 예산이 눈먼 돈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정부의 공급자 중심의 예산배분 체계도 한몫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R&D 예산이 아직도 산업경제 시대의 추격형 양적 지원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정부 내에서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과거 우리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온 노동·자본 중심의 추격형 전략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이미 한계에 도달했는데 R&D 예산은 아직도 여기에 치중돼 있다는 얘기다.
R&D 예산은 지난 2003년 6조5,000억원에서 2017년 3배 이상 19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정부와 민간을 합친 한국의 R&D 투자(2015년·OECD 기준) 규모는 65조9,594억원(583억달러)으로 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위(4.23%), 규모로는 6위 수준이다.
하지만 내실은 기대만큼 성과가 좋지는 않다. 한국경제연구원이 R&D 투자를 많이 하는 50대 국가를 선정해 매출액 대비 투자율(투자 집약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은 3%로 미국(8.5%), 일본(5%), 독일(4.3%)에 비해 떨어진다. 이는 민간이 아닌 대학의 기초연구 경쟁력에서도 나타난다. 세계 3대 과학 저널인 네이처의 대학 기초연구 경쟁력 순위(2016년)에 따르면 서울대는 57위에서 68위로, KAIST는 83위에서 94위로 떨어졌다. R&D 예산의 연구주체별 비중(2014년 기준)을 보면 대학(23.2%)과 출연연구기관(27.5%)의 비중이 기업(20.7%)보다 높다. 아직도 대학과 출연연 중심으로 정부가 정한 상용화 연구에 매몰된 전형적인 추격형 R&D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대학과 출연연, 전형적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간 R&D 비중이 70%에 달하는데 정부 R&D의 개발연구 비중이 48.9%에 달해 민간과 중복 투자의 우려도 크다는 지적이다.
현실이 이러다 보니 정부는 4차 산업혁명 등 국가전략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산업·학교·연구원은 정부 과제 수주를 위한 무한 경쟁에 나서며 차별화된 R&D가 아닌 손쉬운 과제 따내기에 목을 매고 있다.
정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15년 이후 두 차례의 R&D 혁신 방안까지 마련했다. 민간 수탁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 예산을 배분하는 프라운호퍼 방식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제도적 기반은 어느 정도 마련됐지만 아직 현장까지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R&D 예산을 눈먼 돈으로 만드는 또 다른 고질적인 병은 부처 간 칸막이다. R&D 예산이 편성되는 과정을 보면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심의회에서 대부분 결정하는 구조다. 인건비·필수개발비 등을 제외한 70% 정도는 국과심에서 사실상 결정하고 기획재정부에 통보하면 미세 조정하는 방식이다. 예산 삭감도 어려울뿐더러 부처 간 중복 문제도 걸러내기 쉽지 않다. 실례로 스마트 카의 경우 미래부는 원천기술, 산업통상자원부는 실용기술이라는 명목으로 각각 예산을 타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R&D 예산의 전반적인 재수술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예산 당국은 편성의 문제보다 집행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사실 기존의 관성과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재정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고려할 때 예산의 편성부터 심의·집행까지 전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역시 R&D 예산의 양을 늘리기보다는 효율화하는 쪽에 방점을 찍을 계획이다. 예산 당국의 한 관계자는 “국내 R&D 예산은 이미 성숙기에 진입했다”며 “더는 늘리기 어렵다는 게 정부의 판단” 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4차 산업혁명 등 다른 미래 성장동력에 예산을 더 투입하려면 기존 분야에서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세종=김정곤기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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