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결정의 최고책임자인 기금운용본부장이 재판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내부적으로 충분한 가치평가를 거친 결정이 정치적 바람에 휩쓸린다면 투자판단을 누가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후 국민연금을 떠난 실장급 관계자의 말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정점에서 홍역을 치른 국민연금이 대우조선해양(042660) 채무조정을 놓고 얼어붙었다. 대우조선해양 회사채의 최대 투자자인 국민연금은 채무조정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정치적 해석이 꼬리표로 붙으며 비난에 휩싸일 판이다. 국민연금이 자초한 나쁜 선례가 스스로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앞으로 국민연금에 주어진 시간은 2주일 정도다. 이번에는 철저히 객관적 근거와 재무적 관점으로 판단했다는 공감을 얻어야 최순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목소리가 국민연금을 옥죈다. 검찰 수사와 명령권자들의 재판에 무기력과 자괴감이 빠진 국민연금에는 이미 책임질 일에 아예 손을 대지 않으려는 이른바 공직사회의 ‘변양호 신드롬’이 자리를 잡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대우조선해양 채무조정 동의 결정과 관련해 재무적 요소보다 외부 시선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정권의 압력을 받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를 위해 의결권을 이용했다는 검찰 수사 결과가 전혀 관계없는 대우조선해양 채무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연기금 관계자는 “재무적으로 판단하면 국민연금은 당연히 법정관리보다 회사채 채무조정을 선택해야 투자금 회수 비율이 높지만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론, 특정 대기업을 돕는다는 시선에 더 신경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채권단이 의뢰해 삼정KPMG가 실사한 결과를 보면 대우조선해양을 청산하면 5조6,000억원밖에 가치가 남지 않고 국민연금 등 회사채 투자자는 투자금의 10%밖에 건질 수 없다. 외부의 분석은 더욱 명확하다. 신한금융투자는 사채권자 채무조정시 투자금의 56.5~58.5%를 돌려받을 수 있지만 프리패키지플랜(P플랜)으로 넘어가면 회수 자금이 1.76%에 불과할 것으로 분석했다. 앞서 STX조선도 법정관리 후 회사채 투자자는 5% 남짓한 돈만 남게 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홍역을 치른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은 ‘2003년 변양호 신드롬’을 넘어 ‘2017년 안종범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외환은행 헐값매각 시비로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4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명예가 실추되며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것을 지켜본 공직자들의 결론은 ‘논란이 있는 사안에는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안종범 경제수석과 접촉한 모든 사람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는 것을 본 공직사회는 이번에도 ‘문제의 소지가 될 사안은 아예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다. 최순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는 정부의 대우조선해양 지원 방침이 확정된 지난 23일을 전후해 금융당국과도 산업은행과도 접촉을 하지 못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면서 “국민연금도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도 “과거 같으면 금융당국에서 몇 번이나 호출하고도 남을 일이지만 이번에는 전화 한 통화, 문자 하나 없다”고 말했다.
양측 모두 외부 압력으로 오해할 소지를 차단하려는 행보지만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조차 주고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우조선해양과 산은은 기초적인 자료만 국민연금에 전달하며 국민연금 측이 채무조정을 해야 국민연금에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금융당국의 구체적인 근거를 알 수 없었다.
국민연금이 재무적 판단만 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도 문제다. 법정관리에 가지 않고 채무조정을 하면 국민연금 내부에서 투자손실을 인정해야 하는 만큼 실적에 따라 재계약을 하는 운용역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그러나 사실상 법정관리인 P플랜은 법원이 강제해 손실을 부담하는 것이어서 국민연금 내부 직원 입장에서는 스스로 손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분식회계를 토대로 발행한 회사채에 투자했지만 2015년 조기상환 요구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실패 책임은 남는다.
정부도 과장과 축소를 오가며 혼란을 키웠다. 금융위원회는 대우조선해양을 청산하면 59조원의 피해가 예상된다며 불안감을 높였지만 정작 조선업을 소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는 피해규모가 17조 원이라며 반박했다.
가장 큰 원인은 국민연금이 객관적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와 관련이 있으면서 국민연금기금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의결권행사전문기구를 거치지 않고 내부에서 결정하며 의혹을 키웠다.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 출신 관계자는 “결정을 어떻게 하든 과정에서 객관성을 지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없는데 당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신뢰를 잃었다”며 “국내에서 대기업 지분을 가장 많이 들고 있는 국민연금이 앞으로도 계속 특정 기업에 민감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굉장히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대기업 인수합병(M&A)은 이해관계자의 유불리가 엇갈리면서 특혜 논란이 이는 게 다반사다. 그럴수록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기구를 통해 근거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 국민연금은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를 결정할 때 의결권행사기구를 통해 중립을 결정했고 결과는 인수로 이어졌지만 특혜를 줬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국민연금 안팎에서는 국민연금이 어정쩡한 중립 의견을 내놓고 사채권자 집회에 불참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1조5,500억원(기업어음 포함)의 사채권 중 3,900억원을 차지하고 국내에서 가장 전문적인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이 애매한 결론을 내면 나머지 투자자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투자나 의결권 행사도 소극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AA등급으로 안전하다고 여겼던 대우조선해양 회사채의 분식회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앞으로는 우수한 등급의 회사채에도 투자를 꺼릴 수 있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주식의 배당금을 늘리기 위한 반대의결권 행사도 미미하다. 기업지배구조연구원 분석 결과 배당을 위한 반대의결권 행사는 2012년 2건에서 2016년 23건으로 크게 늘지 않았다. 전체 의결권 중 반대 행사 비율은 지난해 기준 4.16%에 불과하다. 특히 2015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국민연금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지낸 이찬우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은 정부나 정치권·노조 등이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말고 국민연금이 찬성이든 반대든 온전히 가입자 이익의 관점에서만 평가해야 한다”면서 “정부나 정치권도 구조조정 정책을 위해 국민연금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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