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대우조선 사태의 뿌리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였다. 당시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기업 구조조정을 반드시 해내겠다”고 보고했지만 이 대통령은 웃어넘겼다고 한다. 기업인 출신인데다 정권 초에 인기 없는 정책을 쓰고 싶지 않아 위기 때 할 수 있는 절호의 구조조정 기회를 놓쳤다.
제때 하지 않은 처방은 이후 약 10년간 대우조선에 수십조원의 혈세를 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이뿐만 아니다. 제조업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취업자는 금융위기 이후 계속 불어났고 최근에 와서야 급격히 쪼그라들며 경기에 부담이 되고 있다.
대통령선거 유세가 시작된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경제학회장)는 20일 “한국 경제 문제의 핵심은 저성장이고 이는 체질개선을 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며 “그러나 어느 후보도 표 떨어지는 ‘쓴 약’을 말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것이 역시 기업 구조조정. 한국은행에 따르면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은 2015년 현재 2,474개, 전체 조사 대상 기업(2만4,392개)의 11.2%에 달했다. 신성장 산업으로 갈 돈줄을 가로채 결국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적기에 정리가 안 된 기업들은 언제든 제2의 대우조선이 돼 돌아올 수 있지만 대선주자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노동개혁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고도 임금은 절반 정도에 불과한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이들이 소비·결혼·출산을 못해 경제 전반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는 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진단(2016년 한국 경제 보고서)이다. 조 교수는 “한 번 정규직을 채용하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니 비정규직 채용을 선호하게 돼 나타난 현상”이라며 “사회 안전망을 만들고 정규직 고용 유연화를 이뤄야 하는데 함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후보들은 1,300만명의 정규직 심기를 건드릴까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부문의 발전과 이를 위한 ‘서비스발전기본법’ 제정이 필수지만 ‘의료 민영화’ 등 민감한 이슈가 불거질까 봐 모든 대선주자는 외면하고 있다. 하태형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어느 대선이나 대선주자들은 달콤한 이야기만 해왔지만 그때는 경제가 5% 이상 고성장하던 시기”라며 “지금은 잠재성장률이 확연하게 둔화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할 때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복지·선심성 공약은 앞다퉈 내놓지만 선언적 내용에 불과한 점도 문제다. 아동수당 신설, 기초연금 증액 등을 외치지만 재원조달 방안은 현실성이 사실상 ‘제로’다. 화력·원자력발전 비중을 줄인다지만 역시 이어질 비용 상승 등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보이지 않는다. 하 고문은 “일본도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할 때 정치인들은 좋은 말과 정책으로 쉬운 길만 선택했다”며 “인구구조·저성장에다 정치까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보건복지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역대 대선과 이후를 보면 공약과 실제 정책은 괴리가 있었고 국민도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공약은 모두 이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하고 담뱃세를 인상한 것에 대한 강한 반발 등을 볼 때 국민의 기대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일단 공약부터 내놓고 보자’ 식의 태도가 만연하면 결국 현실에 부딪히며 공약의 후퇴 혹은 증세 등으로 극심한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정부 안팎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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