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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9>박고석 '도봉산'] 푸른기운 도는 암벽의 서슬...하늘에 닿고 숲으로 퍼지다

몸소 산 오르며 일치된 경험 화폭에 담아

과감한 생략·대담한 붓질, 절친 이중섭 버금

피란지 일상 그린 1951년작 '범일동 풍경'

전쟁 속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력 보여줘

박고석 ‘도봉산’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1980년대 /사진제공=현대화랑




여기 맑은 푸른색으로 한국의 산세를 그린 화가 박고석(1917~2002)이 있다. 그의 눈에는 도봉산 암벽의 서슬이 푸른빛 그 자체였다. 산세를 타고 흐르는 푸른 기운은 하늘에 닿았고 숲으로 퍼졌다. 조국의 산하를 푸른색에 담아 그린 김환기(1913~1974)의 푸른색 ‘환기블루’가 동양적 기품의 애잔함으로 심금을 울린다면 박고석의 맑은 파랑은 테너의 음성처럼 힘차게 감각을 자극하고 뇌리를 스쳐 정신을 깨운다. 뚝심으로 고집스럽게 산을 파고들기는 유영국(1916~2002) 못지않았던 박고석이다. 마음에 품은 산을 그리며 산의 추상성을 완성한 이가 유영국이라면, 박고석은 몸소 산을 오르며 산과 일치된 경험을 화폭에 옮겼다. 오죽했으면 산에서 내려와 등산화를 벗지도 않은 채 그 생생한 발의 기운을 느끼며 그림을 그렸을까. 과감한 생략과 선과 색 몇 개만을 다루는 대담한 붓질로 대상의 특징부터 분위기와 속내까지 끄집어내는 구상(具像) 능력으로는 이중섭(1916~1956)에 버금가는 화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가서는 한집에 살았을 정도로 절친했던 중섭을 먼저 보냈고, 그 유골을 1년이나 집에 두고 살았다. 절망과 허무에 휩싸였던 이중섭의 울부짖음과 시대 정신은 화석처럼 신화가 됐고, 그 두 배의 시간을 살았던 박고석은 중년 이후 산을 오르기 시작해 돌아가 안길 자연에 눈을 떴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동행한 1978년 외설악에서의 박고석 /사진제공=현대화랑


우리나라 근대화단에서 묵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박고석의 이름은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그에게 준 원래 이름은 박요셉, 한자로는 요섭(耀燮)이다. 오래된 옛 돌이라는 뜻의 고석(古石)이라는 예명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이다. 되짚어보면 그의 인생은 딱 그 이름같이 우직했다.

그림으로는 피난지의 일상을 그린 1951년작 ‘범일동 풍경’이 제일 유명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교과서에서도 등장한다. 해질 무렵 철길 주변으로 나와 선 피난민들을 어둑한 갈색조에 검고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특히 전봇대나 지붕, 옷자락 등에 선명하고 강렬한 붉은색 선을 그려 전쟁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 끝까지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력과 치열함을 보여줬다.

평양 태생인 그는 김환기의 4년 후배로 일본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한 10년 일본에 머무르며 초기 화풍을 다졌는데, 도쿄가 폭격을 당하면서 그 시절 작품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화가는 장사를 하며 식솔을 건사했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공동묘지 근처인 범일동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아내가 개천 위에 간이식당을 열어 카레라이스를 팔아 생계를 이었고, 박고석은 그 부근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단출하지만 운치있는 작업실을 지었다. 부산 최초의 아틀리에였던 셈이다.

그 시절 부산은 당대의 예술인들의 집합지였다. 박고석은 동인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중섭·이봉상 등과 함께 광복동 르네상스다방에서 열었던 ‘기조전’은 피난 시기의 몇 안되는 그룹전으로 미술사에 기록됐다. 1956년 결성된 ‘모던아트협회’를 통해 유영국·한묵·황염수·문신·천경자 등과 교류했다.

1951년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에 그린 ‘범일동 풍경’은 선과 색 몇개로 분위기까지 드러낸 구상성이 탁월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현대화랑


지금 생각하면 전쟁 통에서도 이어간 예술활동이 다행스럽지만, 그 곁을 지켜온 아내는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부산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때 이중섭 선생이 와 계셨어요. 남편이 나더러 ‘중섭이 방 굴뚝에 연기라도 한번 내보라’ 역정을 내는 게 화가 나 이중섭 선생 방 청소를 하면서 은박지 그림 그리다 만 것, 부인한테 그림 편지 쓰다가 만 것들 다 쓸어다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땠어요. 수십 년 지나 그 미안한 마음을 고백했더니 ‘당신이 안 태웠으면 지금 그게 돌아다녔을텐데, 잘 태웠어. 그림이 너무 많으면 희소가치가 없어’라고 해 뜻밖이었어요.”



박고석의 미망인 김순자(89) 여사는 이화여대 미술과 출신의 재원이 화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전쟁 중이던 1950년 가을 아버지 불참 속에서 친구 몇과 조촐하게 식 올리던 날 결혼사진을 찍어준 남동생이 바로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다니던 동생 김수근이 징집되자 반지를 팔아 일본으로 밀항시킨 게 이 누이다. 어쩌면 그 덕에 우리는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를 지키게 된 것인지 모른다.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기념비적 건축물을 설계하던 말년의 김수근은 누이의 부탁으로 명륜동 집을 지었다. 박고석은 ‘고석공간’이라는 문패를 단 이 주택의 지하 아틀리에에서 마지막까지 붓을 들었다.

박고석이 대청봉에 걸터앉아 그렸을 1977년작 ‘외설악’. 바다같은 하늘을 표현한 맑은 푸른색은 화가를 대표하는 색깔이다. /사진제공=현대화랑


박고석의 부인은 평생 자기가 손해 본 결혼생활이라 속으로 투덜거렸건만 이제서야 아깝지 않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 놓았다. 그의 집에서 사라진 게 이중섭의 그림 뿐 아니다. 고은 시인도 한때 그들의 집에서 지냈다. ‘세노야’를 비롯해 원고지에 적은 시의 원본은 아이들의 실수였는지 종이뭉치 통째로 화장실에서 쓰였다고 한다. 고은은 박고석을 기억하며 1974년 쓴 글에서 “그의 데상은 고도의 자유에 입각한 자유 그 자체”라며 “그는 지금 여행자다. 산과 산의 여행자이며 산의 애인으로서의 여행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세속의 삶을 하나의 여행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했다.

초반에는 추상미술을 시도하다 1960년대 초반 잠시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던 박고석은 1968년 산행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여러 번이건만 거듭 산으로 향했다. 도봉산 연작을 비롯해 백암산, 내설악, 외설악, 세존봉, 백학봉 등 산 시리즈가 탄생했다. 오래된 돌이 구르고 굴러 결국 돌아갈 제 집은 아마도 산이었으리라. 시대정신을 품고 다양한 시도를 했던 화가는 산을 택했다. 동시에 시대를 풍미한 예인 박고석도 굳건히 곁을 지켜준 산 같은 아내 품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의상디자이너로 3남1녀를 공부시킨 아내가 귀국한 뒤 박고석 부부는 요양 핑계로 설악산에서 2년간 살았다. 김 여사는 “항상 이방인 같았고 내 남편이라기 보다는 손님 같던 그이가 남의 애인도 아닌 오롯한 ‘내 남편’이었고 정말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떠올렸다.

박고석의 1982년작 ‘쌍계사 길’에는 찐득한 질감의 유화물감이 보내기 아쉬운 봄을 붙들어두고 있다. /사진제공=현대화랑


박고석은 과작(寡作)한 작가였다. 밥먹고 이야기하듯 일상적으로 그린 스케치류는 3,000점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그가 남긴 유화는 300점 정도다. 아내는 ‘게으른 남편’이라고 타박했지만 과묵한 화가는 감동이 오기를 기다렸다 몰아치듯 그림을 그리는 게 다였다. 그를 오래 전부터 보아온 엄중구 샘터화랑 대표는 “그림 사겠다는 사람은 100명인데 그림은 열 점이 채 안돼 속 태우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일찍이 박고석을 알아본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은 “집에 가 보면 팔아줄 그림은 안 걸려 있고 등산 장비만 잔뜩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들은 박고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박고석과 산’ 전을 기획했고 소장가들을 수소문해 전 시대를 아우르는 유화 40여 점을 모아 현대화랑에서 선보이고 있다. 귀한 작품들을 빌려온 것이라 작품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박고석의 그림은 푸른색 드리운 산이 최고로 꼽히지만 전시된 그림들은 하나하나 보석같다. 표현주의적인 색의 사용이 과감하고 특별했다. 홍도나 울릉도 등을 그린 그림에서 그는 노란색으로 바다를 그렸다. 해질무렵 노을이 드리운 물결이라고만 여기기에는 너무도 샛노랗다. 이따금 태양의 기운을 머금은 분홍 구름, 흙빛 하늘의 파란 구름이 뜻밖의 활력을 더한다. 그 기발함이 박고석이다.

“산이 보인다는 것은 산 자체나 산의 명암, 광선, 산세들이 드라마틱하게 나와 만난다는 얘기다. 거기서 보이는 산을 ‘가슴에 오는 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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