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를 훨씬 웃도는 벽을 맞닥뜨렸다. 그것도 앞뒤 좌우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벽이다.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 못할 벽 같은 막막한 느낌은 삶 속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뛰어넘기는 버겁고 깨부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종현(82)의 그림은 그 암담한 벽을 뚫는 기분이다.
세계적 미술 명문인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SAIC) 박물관이 소장한 그의 1979년작 ‘접합(Conjunction) 79-31’을 접한 첫인상은 새벽에 소복이 맺힌 이슬 같았다. 동글동글 작은 물감 알갱이들이, 어릴 적 뛰놀던 앞마당 흙을 퍼담아 놓은 듯한 화판 위에 자리잡은 모습은 그림 가까이에 다가서야만 보인다. 그러나 매끈한 캔버스가 아니라 얼기설기한 마대로 만든 화판임을 눈치채고, 그 뒷면에서 오일 물감을 밀어올려 완성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림이 달리 보인다. 이슬이 아니라 땀이다. 벽을 뚫고 나온 그 고된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다. 마대 뒷면에서 짓이겨 배어난 물감은 삐죽거리며 저마다의 표정을 담아 얼굴을 내민다. 뒤엉킨 마대의 직조를 통과해야만 앞으로 나설 수 있고 관람객과 마주할 수 있으니 인격 없는 물감이지만 하나같이 당당하다. 재료의 물성과 작가의 행위가 그야말로 물아일체를 이루며 작품이 됐다.
193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하종현은 일본의 패망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랐다. “나와 내 부모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못 먹고 가난하고 참담하던 폐허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 상황에서 미술대학에 가기는 했지만 물감이나 캔버스를 사서 여유롭게 작업할 형편은 아니었소.”
젊은 화가에게는 그러나 물질적 궁핍보다도 정신적 빈곤이 더 괴로웠다. “아무리 잘 그려본들 서양 물감, 서양식 기법으로 서양을 닮은 그림을 그린 것에 나는 없지 않은가”라는 고민은 그의 숱한 밤을 어지럽혔고 “서양식 그림에서 독립해 나만의 독자적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였다.
등단 초창기이던 1960년대의 그는 당시 화단의 주류이던 국전(國展)에 매달리지 않고 파격의 전위예술을 시도하는 아방가르드협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인물·정물·풍경 같은 구상회화는 일찌감치 접었다. 구체적인 형상 없이 재료 그 자체와 작가의 즉흥적 표현을 강조한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미술)’ 경향이 강했다. 오히려 입체적인 추상 작업에 몰두해 용수철·철조망·신문 따위를 그림 위에 붙였다. “답답한 시대와 더불어 살았을 따름이지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선을 그었지만 철조망 박힌 흙빛 그림이 품은 분단 조국의 아픔, 다 끊어져 가는 밧줄을 이어놓은 작품에 드리운 남북의 긴장감은 사회상을 투영하고 있다. 유신 체제 아래 늘 검열을 받아야만 했던 신문과 인쇄되기 전 신문을 나란히 쌓은 ‘신문지’를 비롯해 어디로 튈지 모르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용수철, 힘겨워도 파고드는 나사, 눈물도 더러움도 닦아내 준 휴지 등의 소재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 출신의 평론가 필립 다장은 그의 초기작에 대해 “철사는 마치 육체를 가두고 상처를 내듯이 캔버스를 조이고 뚫는다. 철사가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펼쳐지면서 도처에 억압의 기운이 깔리고 작가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수용소·감옥·노선·군법·선언·전시상황과 같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고 평했다.
하종현이 1970년대 중반 마대를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래 마대는 전투진지를 구축하지만 전후 미군은 마대 자루에 밀·보리 같은 구호물품을 담아다 주곤 했지요. 다 쓴 마대를 털고 말아서 남대문 시장에서 싸게 파는 걸 사다가 캔버스 대신 재료로 삼았지요.”
그렇게 평범한 마대 천은 시대상과 일상성을 투영하며 그를 대표하는 재료가 됐다. 세워 놓으니 벽 같은 마대 화판 앞에서 그는 갑갑함에 가슴 치다 깨쳤다. 어떻게든 그 마대의 틈을 파고들어 보리라. 뒷면에서 유화 물감을 밀어냈고 앞으로 배어 나온 것을 자유롭게 변주해 역작인 ‘접합’ 시리즈가 탄생했다. 중국화나 한국화의 전통기법으로 뒷면에서 안료를 밀어내는 ‘배압법’, 뒷면에 색칠해 앞에서 그 비친 모습을 보는 ‘배채법’ 등이 있지만 재료나 의도 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안동 하회마을의 담벼락 색깔 같은 암갈색, 비 갠 지리산 중턱의 안개 같은 하얀색 등은 작가가 직접 배합하는 하종현 만의 색이다. 붓을 대신해 물감을 짓이기고 밀어내고 펴바르는 ‘도구’ 또한 노화가가 손수 만들어 쓴다.
지금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박서보·이우환·정상화 등과 함께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지만 정작 발표 당시 국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작품은 오히려 일본에서 먼저, 더 많이 팔렸고 지금은 이우환과 더불어 일본미술관이 가장 많이 소장한 한국인 화가로 꼽힌다. 일본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1931-2011)는 “근대화 과정에서 재주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양으로 유학 가 서구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소중한 동양의 미술을 팽개쳤을 때 하종현에게서 진짜 동양을 발견했다”고 호평했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30년 재직하고 서울시립미술관장(2001~2006년)을 지낸 그가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오직 화가로 돌아오자 때마침 세계 미술계가 그를 불러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 이어 2014년에는 뉴욕의 블럼앤포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관련 특별전으로 열린 ‘단색화’ 전시는 하종현의 작품을 세계 전역으로 알리는 분수령이 됐다. 지금은 유럽화랑 알민레쉬갤러리 파리 전시장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다음 달에는 런던 전시장으로 옮겨간다. 이미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해 솔로몬 R.구겐하임미술관, 홍콩 M+ 시각문화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얼마전 유럽 전시 때 파블로 피카소의 손자인 베르나르 피카소와 큐레이터, 컬렉터들의 초대를 받아 함께 얘기를 나누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종현의 작품은 서양미술의 사조 중 어디에 끼워넣어야 하나,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더군요. 그래서 내가 답했죠. 내가 어디서 배워서 계승했는가만 보려 하지 말고 당신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 그 다른 점을 찾아보면 오히려 연결시키기고 이해하고 설명하기 좋을 것이라고요.”
하종현은 2015년부터 선보인 신작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연기(smoke)를 그림 속으로 붙들었다. 마대 위로 밀려나온 물감에 연기를 쏘이면 그 표면에 자연스럽게 연기가 부착되는 원리다. 뿌연 연기와 그을림은 자연스러운 그림자처럼 물감 위에 내려앉는다. 여전히 청춘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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