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바뀔 때마다 금융권에서는 정권 코드에 맞춘 금융상품을 우후죽순처럼 쏟아냈다가 정권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거둬들이는 게 흔한 일이 됐다. 정부도 가용자원이 많은 금융권을 통해 손쉽게 치적을 만들기 위해 이 같은 코드 금융을 선호하고 거버넌스가 취약한 금융권도 역시 코드에 맞춰 앞다퉈 상품 출시 경쟁에 나섰다가 5년 뒤 폐기 처분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당시 녹색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각 금융협회와 은행ㆍ증권ㆍ보험 등 전 금융업권이 합쳐 2009년 설립한 녹색금융협의회는 박근혜 정부 들어 사실상 해체 상태가 됐다. 은행들도 앞다퉈 행장 직속으로 녹색금융사업부를 만들었지만 흐지부지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년 대계를 내다본 제대로 된 금융정책은 온 데 간 데 없고 새 정부 5년간 강조했던 금융상품이 금융정책으로 각인될 정도가 됐다.
박근혜 정부 때 부상했던 청년희망펀드나 기술금융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청년희망펀드는 사용처도 당초 취지와 벗어나게 운영되고 있어 국고환수 논의마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금융산업이 이처럼 정권 코드에 맞는 상품 개발에만 몰두하다 보니 스스로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자성도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권이 5년마다 바뀌는 정권 코드에 맞춰 ‘에이전시 역할’을 하다 보니 진짜 금융산업 경쟁력에 쏟아야 할 역량을 낭비하고 있다”며 “정부의 금융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철학의 빈곤이 낳은 결과물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금융산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금융철학으로 금융정책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매 정권마다 단발성으로 움직이다 보니 금융산업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금융산업이 ‘우간다’보다도 못하다는 혹평을 받은 것도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새 정부 역시 ‘서민금융’을 강조하면서 금융권에서는 벌써부터 부채 탕감이나 카드 수수료 인하 등과 같은 코드 맞추기에 나서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들 정책은 잘못하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어 정교하게 다루지 않으면 국내 금융산업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깊은 고민과 철학을 반영하지 않은 채 전시행정에 치우쳐 금융정책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금융권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를 따라야 하는 숙제가 되는 현실을 감안한 정책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고 투자은행(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산업을 정책을 대행하는 ‘유닛’ 정도의 역할로 치부하는 한 국내 금융산업 경쟁력은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보리기자 bori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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