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에는 맥주보다 콜라’라는 1년차 신입사원 오민우(27)씨는 술 포비아다. 대학생 시절에도 “먹고 죽자”며 달려들던 동기들에게 그는 “죽어도 먹기 싫다”며 콜라를 고집했다. 우연히 나간 술자리에서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죠”라며 누군가 술을 권하면 불쾌감부터 느낀다. 최근 오씨는 페이스북 ‘술을 싫어하는 모임’ 페이지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술없는모임’이라는 해시태그를 볼 때마다 그는 관계 맺기에 필요한 건 건 술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는다.
#매일 저녁 크로스핏 학원에 다니는 한 대리(30)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다. 입사했을 때 ‘술을 못하면 인사에 불이익이 있을까’, ‘친목 쌓기 어려울까’ 걱정도 했지만 막상 주변을 보니 술을 못하는 동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취향이 비슷한 동료들과 단체로 회사 근처 헬스장 회원으로 가입해 운동에 흠뻑 취하다 보면 어느새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다.
술을 거부하는 것이 당당해진 시대가 왔다. 과거 ‘술=친목’임을 강조하며 ‘반강제’로 형성됐던 술자리가 이젠 술을 아예 거부하거나 ‘스몰럭셔리’, ‘편주(酒)족’ 등 관계보다 ‘개성’을 추구하는 문화로 바뀌는 추세다.
광고업체 이노션의 빅데이터 분석조직인 디지털커맨드센터가 2015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까지 포털, 블로그·카페, 동호회 등의 소셜데이터 9억여 건을 분석한 결과 집단이 아닌 혼자 술을 즐기는 키워드가 7만5,675건으로 1년 새 17배 늘기도 했다. 함께 마시는 술 자리가 확연히 줄어든 모양새다. 직장인 이은지 씨(29)는 “왁자지껄하게 술 먹는 분위기 자체가 업무의 연장선이라 느껴져 부담이 됐다”며 “예전에는 술 못 먹는다고 말하는 게 꺼려졌지만 이젠 강요하지 않아 편하게 말해도 존중해주는 분위기라 좋다”고 전했다.
이 같은 술자리 문화 변화상은 여러 지표에서 확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술 소비량이 1980년만 하더라도 34개 회원국 가운데 8위의 ‘음주대국’이었으나 2013년에는 22위로 떨어졌다. 2차 회식의 대표 주종이었던 ‘위스키’도 2008년 284만 상자까지 판매되다 지난해 167만 상자까지 떨어지며 8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대학생 이 씨(23)는 “예전에 ‘먹고 죽자’, ‘거국적으로’ 등 모두를 포함한 음주 단어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말도 없어지고 술을 못해도 괜찮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술을 거부하는 모임도 활발하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지난달부터 한 달 간 가입자가 약 3만명 이상 증가하며 현재 20만여명이 팔로우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그동안 술을 못 마셔도 말 못하고 있었는데 게시글들이 대신 욕해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친목 도모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술을 마시면서 친목을 도모하나요”,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못 마십니다. 술 안 먹을거면 모임 자리에 왜 오냐는 말이 제일 싫습니다”란 글을 남겼다.
대학가에서는 ‘노알콜러’란 신조어를 통해 술 먹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연합 동아리도 만들어졌다. “술 없이 신나게 노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잘할 수 없는 일. 우리는 잘 놀 수 있지!”란 문구를 통해 회원들을 모집한다. 동아리는 ‘술을 절대 마시지 않는다’, ‘술 마시는 돈을 아껴 건전한 여가활동을 위해 쓴다’를 원칙으로 세워 ‘술 안 먹는 동아리’를 전면으로 홍보한다.
삼육대 보건관리학 천성수 교수는 “과거에는 술을 잘 먹는 것이 호방하고, 사회 활동을 잘한다는 것으로 인식됐지만 요즘은 술을 잘 먹는 것 자체가 낙인이 될 수 있고, 오점이 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기업에서도 음주 자제가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술 마시는 문화를 지양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박경원 보배정신건강상담센터장은 “최근 술이 아닌 운동 등 다른 매개체를 통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 활동이 늘고 있다”며 “각자 편한 관계 속에서 강요받지 않을 때 사회적 성숙도나 생산성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그래픽=정수현기자·조은지인턴기자 valu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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