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레버 CEO 파울 폴만 Paul Polman은 회사를 ’책임 자본주의‘ 모델로 재탄생시켰다. 이 생활용품 공룡기업은 새로운 모델의 성공을 입증할 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을까?
UNILEVER 유니레버
▶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순위: 38위(2016년)
▶ 매출: 580억 달러 2016년 영업이익: 57억 달러
▶ 직원: 16만 9,000명 브랜드 수: 400개 이상
잉글랜드 북부 리버풀 외곽에 위치한 유니레버 공장 주변에 차가운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자동화된 조립 라인을 비추는 조명이 환하게 빛나며 어두운 바깥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연보라색으로 늘어선 수 천개의 통이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힘차게 움직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중요한 차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새 디자인의 용기는 다른 조립 라인에서 생산되는 기존의 긴 모양 용기보다 더 땅딸막하고, 액상이 나오는 용기 입구 부분도 더 작았다. 섬유 유연제 브랜드 ‘컴포트 Comfort’의 신모델인 이 제품의 라벨에는 ‘38회 세탁분’이란 문구가 쓰여있었다. 이전 제품의 33회보다 더 많은 세탁 분량이다. 유니레버가 이 제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구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 ’물‘을 절약하기 위해 소비자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제품의 콘셉트는 세계 최대 규모 생활용품 기업의 재치 넘치는 상품 광고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층 더 개선되고 농축된 액상 유연제의 개발은 중요한 혁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신제품은 영국·네덜란드 합작 기업 유니레버가 전세계 300개 이상의 공장에서 진행하는 수 많은 기능 업그레이드 제품 중 하나다. 이 공장들은 무려 25억 여명에 달하는 소비자들-세계 인구 3명 중 1명-을 위해 400개가 넘는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혁신의 중심에는 유니레버가 다른 기업들뿐 아니라 투자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들어있다: 사업방식을 빠르게 바꾸지 않으면 대기업들도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 결국 도태된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벤 앤드 제리 Ben & Jerry 아이스크림, 도브 Dove 비누, 립톤 Lipton 아이스티, 헬만 Hellmann 마요네즈 등 유니레버 제품들을 쇼핑 카트에 담을 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세계의 현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제품들이 생태계 재앙으로 진열대에서 사라질 날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위기 대응책으로 탄생했던 유니레버에겐 재앙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조차 행동을 취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만하다. 유니레버는 1880년대 리버풀 인근 포트 선라이트 Port Sunlight라는 마을에서 탄생했다. 빨간 벽돌 건물들이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지명은 유니레버가 세계 최초로 브랜드를 붙여 포장판매 했던 비누(이 회사의 첫 제품이다) 이름에서 유래했다. 유니레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 계속된 빈곤과 불결한 환경으로 만연했던 전염병과 소아 사망을 근절하기 위해 설립됐다. 그리고 1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니레버에는 ‘전세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강력하게 살아 있다.
이런 절박함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인물이 바로 유니레버의 CEO 파울 폴만(60)이다. 큰 키에 온화한 말씨를 지닌 네덜란드 출신의 폴만은 지난 8년 동안 최고경영자로 이 회사를 이끌어왔다. 유니레버의 런던 본사는 리버풀에서 남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템스 강변에 위치해있다. 이곳에서 만난 폴만은 1인용 팔걸이 소파에 앉아, 매출 580억 달러를 올리는 기업의 최고경영진 집무실이 아닌 UN총회에서나 들을 법한 수치들을 줄줄 읊어댔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11월 폴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가 높은 수익을 올려서가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기후 변화 억제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폴만을 만난 때는 쌀쌀했던 2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그가 유니레버의 2016년 실적 발표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폴만은 특별히 회사 실적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유니레버의 매출 성장세가 주춤한 바람에 2016년 순이익은 57억 달러에 머물렀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더욱 긴급해 보이는 수치에 주목했다. 그는 그 통계가 유니레버와 다른 기업들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폴만은 전세계 1억 6,000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인한 발달 저하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오염으로 매년 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기 사망하고 있고, 상위 부자 10억 명이 전 세계 천연 자원의 75%를 소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폴만은 “세계 식량의 30~40%가 낭비되는 와중에서도 수백 만 명의 인구가 굶주린 채 잠을 청하고 있다”며 현재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덕적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폴만은 필자에게 읽어보라며 문서 하나를 건넸다. ‘기업 및 지속가능 발전위원회(Business & Sustainable Development Commission·BSDC)’의 보고서였다. 여러 CEO들과 비정부기구(NGO)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UN의 개발 목표를 적용한 사업성장을 지지하고 있다. 2012년 당시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이 글로벌 기구의 17가지 목표를 선정하는 26명 중 한 명으로 폴만을 임명했다. 기업가로는 그가 유일했다. 2015년 발표된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는 빈곤 퇴치와 양성평등이 포함돼 있었다. 필자가 폴만에게 유니레버에서 업무를 보는 시간과 정치인 및 각국 지도자들에게 로비를 하거나 NGO 기구와 세계경제포럼(WEF),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등에서 연설을 하며 보내는 시간을 비교해 달라고 하자 그는 대답 대신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둘 다 내게는 같은 업무”라고 말했다. 이어 폴만은 “두 업무를 분리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가 사업을 운영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이 점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폴만과 유니레버가 풀어야 할 과제다. 세계가 여러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금세기 들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고, 세계 최상위 부유층과 최하위 빈곤층의 격차도 극심해졌다. 하지만 폴만이 세계 다른 기업인들에게 ‘이런 문제들은 기업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 최소한 남은 CEO 재직 기간 동안에라도 설득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작년 유니레버가 마진 데커스 Marijn Dekkers를 새 회장으로 임명했을 때, 투자자들이 결정한 그의 첫 임무는 폴만의 후임자를 찾는 일이었다.
폴만은 자신의 직위를 걱정한다고 해도, 겉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인물이다. 자신의 개발 전략을 반드시 성공 시키려는 강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폴만에게 이 전략에 대한 논리는 너무나 명확하다. 환경적 위험과 빈곤은 데이터 저장에서 세탁 세제 제조, 차 재배에 이르기까지 기업 운영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것이다. 폴만은 이 점을 간과하는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는 반면, 양성평등을 실현하고 환경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은 분명 더 많은 수익을 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폴만은 유니레버가 다른 기업들에게 앞으로 나가야 할 최선의 길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선사업을 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업가”라고 말했다.
유니레버의 세계적인 평판은 폴만이 지속가능성을 핵심 경영원칙으로 내세운 후부터 향상되어왔다. 소비자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유니레버는 올해 포춘 선정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50’ 중 38위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의 41위에서 세 단계 올라섰다. 유니레버는 수 천명의 기업 임원과 애널리스트들의 설문을 통해 선정하는 이 리스트에 6년 연속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니레버의 선의는 그 중요도에 비해, 감정이 철저히 배제되는 세계 시장에서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2개월 동안 S&P 500 지수는 25% 급등한 반면, 유니레버 주가는 2% 이상 하락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활동 중인 미국 투자회사 제프리스 Jefferies의 애널리스트 마틴 더부 Martin Deboo는 ‘USLP’라 불리는 폴만의 대표적 유니레버 사업 청사진을 거론하며 “내가 대화를 나눈 소수의 투자자들은 ‘유니레버의 지속 가능한 생활 계획(Unilever’s Sustainable Living Plan)’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폴만이 2010년 도입한 이 계획은 현재 유니레버가 전세계에서 벌이는 기업활동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무려 50개의 목표를 망라한 이 계획은 모든 무위험 쓰레기의 토지매립 금지, 500만 명의 여성인력 훈련, 공장폐수 절반 축소 등을 포함하고 있다.
애널리스트 더부는 세계 경제침체로 지난 2년간 유니레버의 성장세가 주춤했던 탓에, 풀만의 전략이 다른 여러 요소들을 딛고 성공할 수 있을지 일부 투자자들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니레버에 따르면, 회사 투자자 80%은 이 경영모델이 기업가치를 장기적으로 높여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더부는 폴만이 전형적인 다보스맨 Davos Man *역주: 연례 다보스 포럼에서 세계화를 주창하는 참가자들 으로 변신한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세세한
운영 내용보단 전지구적 문제 해결에 훨씬 더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폴만도 인정한다. 그는 “개발에 정말 관심이 많다”며 “유니레버 같은 기업들을 움직여 개발을 추진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기본 연봉 127만 달러 외의 임금 인상을 거절한 폴만은 자신의 직위에 대해 “CEO가 되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정말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정성이 담긴 말이기는 하지만, 투자자들에겐 폴만이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쏟아 붓고 있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더부는 “초창기 성과가 좋았을 때 유니레버의 USLP 계획을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이젠 좀 더 가시적인 영업이익과 실적 수치를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유니레버에서 근무한 지 10년 가까이 된 지금, 사람들은 폴만의 원대한 계획이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지 판단을 미루고 있다. 그는 세상을 구하면서도 비누와 과자 같은 제품을 팔아 주주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폴만이 이끄는 유니레버가 성공한 다국적 기업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까?
폴만이 가장 크게 열정을 갖고 있는 문제는 기후변화다. 그는 2015년 12월 열린 파리 기후변화 협정에서 재계 리더들과 정치인들에게 “기업의 생존은 환경 재앙을 방지하는데 달려있다”고 역설했다. 트럼프 행정부에도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있지만, 폴만은 반대론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논쟁에서 패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터넷 정보에 민감하고, 지구 환경을 크게 걱정하는 젊은 세대들을 높이 평가한다. 폴만은 CEO들의 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며 “5년 전만 해도 기후변화 패널로 활동하는 CEO를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폴만은 이어 “과거 그들은 턱수염을 기르고 샌들을 신은 사람들이 공격할까봐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세계의 여러 난제들을 푸는 건 기업의 역할”이라는 폴만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기업인들의 사고 자체가 변해야 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전형적으로 환경과 빈곤 문제를 사회적 책임(CSR)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고, 매출을 올리는 사업과는 별도로 운영해왔다. 폴만은 그 둘을 분리하는 게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금융위기의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당시 스위스의 경쟁기업 네슬레를 떠나 유니레버 CEO로 이직을 했을 때, 폴만은 CSR 부서를 해체했다. 대신 유니레버의 직원 16만 9,000명에게 회사의 광범위한 사회적 약속을 자신들의 사업 목표로 설정할 것을 지시했다. 유니레버의 지속가능 프로그램 책임자 키스 위드 Keith Weed가 링크트인에 게재한 대로, 회사 전반에 걸쳐 운영되는 이 전략은 “예외 없이 모든 브랜드와 시장에 적용되고 있다”.
이 전략은 대담한 변화의 일부분이었다. 폴만은 기업의 환경 발자국(environmental footprint) *역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발자국으로 환산한 수치 을 반으로 줄이면서도, 매출은 400억 달러에서 800억 달러로 두 배 늘리는 것이 목표였다고 밝혔다. 유니레버 직원들은 회사 매출이 두 배로 뛰지는 않았지만 폴만이 취임한 이후 100억 유로-통화 등락폭이 커서 미화로 환산하면 약 40억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이상 증가했다며, 공격적인 목표가 ‘성장 의욕’을 고취했다고 말했다.
폴만은 유니레버의 지속가능한 USLP 계획이 건실한 성과를 거두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일부 목표는 기업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투자자들을 위한 분기별 수익 가이던스 체계-폴만은 이에 대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표현했다-를 없앴다. 그는 “분기별 목표 설정은 포악한 덫과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분기별 목표 설정은 상장기업들이 투자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주가를 올리게 하는 반면, 근무 조건과 환경 개선 같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임무 등을 등한시 하게 만든다고 비판하고 있다.
폴만은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며 “사업을 하는 진정한 목표는 항상 사회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런던 본사로부터 수 천마일 떨어진 지역에서도, 동기 부여 벽면 포스터와 건강 식품 등을 이용한 폴만의 전략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그가 강조하는 필연적인 성장 잠재력뿐만 아니라,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 또한 가시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차별이 존재했고 환경적으로 나쁜 관례가 있는 곳에선 어려움이 더욱 많다. 유니레버는 약 7만 6,000곳의 공급업체를 보유하고 있는데, 전세계 6개 국가를 제외한 190개국에서 생산과 판매를 하고 있다. 유니레버의 매출 60%는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신흥시장에서 나온다(신시내티에 본사를 둔 P&G의 같은 지역 매출은 40%에도 못 미친다). 이런 신흥시장에서 급성장하는 중산층 소비자들은 유니레버의 성장 잠재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유니레버의 지속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폴만이 유니레버 CEO로 취임한 직후, 비영리단체 옥스팜 Oxfam이 회사 공장의 작업조건 조사에 착수한 적이 있었다. 옥스팜은 시험 대상으로 1995년 공장 운영이 시작된 베트남을 선택했다. 현재 약 1만 5,000명의 베트남 직원들이 이 곳에서 라이프부이 Lifebuoy 비누와 크노르 Knorr 알갱이 수프 등 유니레버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2013년 발간된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 공장에선 폴만이 주장하는 정당한 급여 지급 같은 유니레버의 원칙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조사를 진행한 옥스팜의 레이철 윌쇼 Rachel Wilshaw는 “직원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받아야 할 액수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많은 직원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2~3개씩 더 하고 있었다”며 “정당하게 근로자를 대우한다고 믿고 있었던 유니레버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고 설명했다. 윌쇼는 “회사가 직원들이 최저임금보단 많이 받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크게 부족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폴만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공급업자들이 런던에서 내리는 지침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니레버는 폴만 주도 하에 2015년 회사 운영에 대한 인권 보고서를 발표했다(미 국무부가 매년 발표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도 계약업체 근로자 중 열악한 건강 및 안전 조건에서 근무하면서도 저임금을 받는 사례가 수백 건에 달했다. 유니레버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중 13%만이 해결된 상황이다.
노조 위원과 NGO 단체들은 유니레버가 진지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며, 전세계 곳곳에서 대기업 제품을 생산하는 공급업체들도 대개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옥스팜에 따르면, 이 단체가 베트남 보고서를 발표한 후, 유니레버는 전세계 공장 근로자의 임금을 조사하고 공급업체들의 준수사항을 강화했다. 옥스팜은 지난해에도 후속 보고서를 발간했다. 윌쇼는 폴만에 대해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에 열린 자세로 임하는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며 그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옥스팜의 보고서에서 빠진 내용은 유니레버의 이런 개선 노력들이 베트남 매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냐였다. 약 9,000만 명의 인구와 급성장하는 중산층을 가진 베트남 시장에서, 회사는 열악한 근로 조건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막아야만 했다. 수백 만 명의 새로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건 베트남 같은 신흥 시장에서 사업을 키우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유니레버는 3년 전 베트남에서 공산 정부와 협력해 ‘완벽한 마을(perfect villages)’이라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회사는 약 1,000곳의 시골 마을에서 위생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사 제품을 홍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화장실용 세척제나 치약 등이 들어있는 키트를 무료로 배포하고,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진료소 시설을 개선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에서 유니레버 소비자 개발을 담당하는 부사장 반 응우옌 티 빗 Van Nguyen Thi Bich은 “우리 브랜드 제품이 마을 곳곳 깊숙이 들어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유니레버에겐 이런 ‘완벽한 마을들’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는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학교에서 제품 사용법을 가르쳐주면 집에 가서 아이들이 엄마에게 그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유니레버는 좋은 일을 하면서 제품 사용을 함께 권유하는 전술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 접근법은 베트남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유니레버는 2008년 50개국에서 ‘세계 손씻기 날’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폴만이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먼 시골지역까지 직접 찾아가서 ‘유니레버 비누’로 손을 씻기도 했다. 라이프부이는 이 캠페인의 대표 상품이다. 회사는 2020년까지 10억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벌써 그 인원의 반을 채웠다. 극심한 가뭄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몇몇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유니레버는 물을 채운 드럼통을 쌓아 회사 비누 제품인 ‘선라이트’ 이름으로 광고 게시판을 세우기도 했다(당연히 비누를 사용하려면 물은 필수다). 그리고 이 드럼통의 물을 가뭄 피해가 극심한 지역들로 보냈다.
이 전략은 유니레버의 첫 사업 모델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880년대 로드 레버 Lord Lever는 잉글랜드 가정의 위생을 개선하기 위해 리버풀에서 첫 사업모델을 구상했다. 당시 결과는 매우 좋았다. 회사 실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니레버는 당시의 성공이 재현되길 바라고 있다. 폴만은 “그때의 참혹했던 상황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과 인도로 옮겨갔다”고 설명했다.
유니레버가 경쟁상대들을 물리치려면, 세탁 비누와 화장실 세척제를 신흥시장에서 판매하는 것 외에도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뉴욕, 베를린, 도쿄 등의 밀레니얼 세대 소비를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창출하는 수요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소비자 행동패턴을 급속도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전통적인 대량 생산 제품보단 지역의 작은 브랜드를 선호한다. 유니레버가 지금까지 주력해온 부분이다. 비록 회사가 R&D 예산으로 연 10억 달러 이상-포트 선라이트에 처음 설립된 이후 전세계에 총 6개의 연구센터를 만들었다-을 투자하고 있지만, 현재의 신제품 투자로는 수요 증가를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다. 그래서 폴만은 기업 인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유니레버는 지난 2년 동안 쌓아둔 잉여 현금(작년 기준 약 51억 달러)으로 작은 브랜드들을 사들여왔다. 매장에서 좀 더 비싼 가격에 팔리는 브랜드들이었다. 2015년에는 미국의 피부관리 제품 기업 뮤라드 Murad와 더말로지카 Dermalogica를 인수했다. 유니레버는 이 두 기업이 지난해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년 7월에는 회원에게 매달 면도 제품을 배송해주는 달러 셰이브 클럽 Dollar Shave Club(캘리포니아 주 베니스 소재)을 10억 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9월에 인수한 버몬트 소재 세븐스 제너레이션 Seventh Generation은 환경 친화적 세제와 청소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당시 한 소식통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인수금액이 6억~7억 달러 정도였다”고 말한 바 있다.
흥분할 만한 인수 계약을 여러 건 성사시켰음에도, 폴만은 2016년 실적을 발표했던 지난 1월 말 애널리스트들과의 전화통화에서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었다. 그 날 아침 신문은 전날 다우지수가 2만 선을 돌파한 사실을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니레버의 매출은 전년 대비 1% 감소했다(회사는 달러 강세 등 환율을 고려하면 판매가 4.3% 늘었다고 주장했다). 유니레버는 올해 10억 달러의 비용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화통화 소식을 들은 일부 투자자들은 ‘유니레버가 부분적으로 규모보단 높은 이익을 통한 성장을 꾀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런던 소시에테 제네랄 Societe Generale의 애널리스트 워런 애커먼 Warren Ackerman은 “유니레버의 문제는 대량 판매용 소비자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세븐스 제너레이션 같은 고급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 외에도 “규모의 성장을 꾀하기 위해선 혁신이 절실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의 일부분일 뿐이다. 폴만은 애널리스트들과의 통화에서 “갑작스럽게 터진 사건들 때문에 회사가 타격을 입었다”고 털어놓았다. 작년 5월
실시된 브렉시트 투표 이후 파운드화는 유로와 달러 대비 20%나 폭락했다. 유니레버에게 매우 큰 시장인 브라질의 경기 침체도 장기화되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인도 정부가 국민들이 일반 생활용품을 구매할 때 많이 사용하는 100 루피와 1,000루피 지폐 사용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폴만은 투자자들에게 앞으로 예상되는 다른 위기들을 일일이 일러주었다: “경제 성장 둔화, 지정학적 긴장, 그에 따른 세계화 및 기술에 대한 반발, 지구의 증가하는 환경 스트레스, 소비자 트렌드와 쇼핑 경로, 미디어의 분화 등이 위험요소다.” 몇 시간 후 회사 주가는 런던증권시장에서 4.4%나 급락했다.
필자가 며칠 후 폴만에게 왜 그렇게 세상을 암울하게 보냐고 묻자, 그는 “새삼 새로울 게 뭐 있나? 사람들이 놀라는 게 더 이상하다”고 말했다.
폴만에게 기후변화를 막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캠페인은 여전히 부족하다. 기업들을 옥죄는 더 큰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만 이득을 보는 세계 금융 시스템도 그 중 하나다. 지난 1월에 나온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최고부자 8명의 재산은 전 세계 인구 반이 보유한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하다. 폴만은 현 금융시스템 하에선 앞날이 캄캄하다며 “더 개선된 자본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폴만은 “글로벌 거버넌스가 무너졌다”며 “세계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에 63조 달러를 쏟아 부었는데, 성장은 조금도 회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들이 암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폴만은 미래를 낙관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노동권리 주창과 탄소배출 제로라는 유니레버의 지속가능 계획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명제는 상충할 수도 있지만, 결국엔 사업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폴만이 그리는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선 어렵지만 균형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유니레버는 베트남 운영 실태를 조사했다. 이 곳 공급업체들은 유니레버가 ‘빠르고 저렴한’ 생산과 ‘지속가능한’ 생산 가운데 어떤 것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옥스팜의 윌쇼는 “유니레버는 상당히 좋은 가격과 생산 시간을 확보하면서도 근로자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데, 이 둘은 함께 이루기 힘든 목표다. 대개는 상업적 필요성이 앞서기 마련이다”라고 분석했다.
윌쇼는 폴만이 유니레버를 떠나기 전,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공급업체들에게 혜택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니레버가 폴만의 ‘더 개선된 자본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고 있다.
그녀는 “결국 유니레버의 주인은 주주이고, 그들이 원하는 건 수익”이라고 말했다.
폴만의 세상 바꾸기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유니레버의 지속가능한 계획 목표를 이루는 것도 아주 복잡하고 장기적인 과제다. 회사는 지난해 ‘온실가스 절반 감축 목표를 당초 희망했던 것보다 10년 늦어진 2030년에야 달성할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때는 이미 폴만이 유니레버를 떠난 뒤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아이디어가 사업 방식을 개선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폴만은 “이미 회사가 성공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를 영입하고 있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인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1년에 180만 건의 입사지원서가 접수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화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폴만은 자신의 경제 개발 목표가 회사의 수익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유니레버가 자사의 주요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수억 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만은 “8억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식료품을 팔 큰 기회를 갖게 된다”며 “우리가 빈곤층을 위해 싸워서 그 일에 성공하면 결국 주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라도 말이다.
■ 하나의 지구, 400개 이상의 브랜드
유니레버는 지속가능한 삶 프로젝트의 목표인 ‘물 사용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절반 감축’, ‘쓰레기 매립 중단’, ‘질병 퇴치 지원’에 따라 모든 브랜드를 재정의하고 있다. 5가지 예를 살펴보자.
벤 & 제리 세이브 아워 스월드 BEN & JERRY’S SAVE OUR SWIRLED
유니레버는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 체결을 기념해 마시멜로 맛의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다. 심지어 자체 구호도 만들었다. “녹으면 안돼!”
라이프부이 토털 10 핸드워시 LIFEBUOY TOTAL 10 HANDWASH
이 손 세정제는 치명적인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유니레버 ‘전 세계 손 씻기 캠페인’의 핵심 브랜드다. 현재 매년 500만 명의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도브 보디워시 DOVE BODY WASH
유니레버는 새 뮤셀MuCell 기술로 제품 통 제작에 드는 플라스틱 15%를 절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제조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공개하기도 했다.
컴포트 원 린스 COMFORT ONE RINSE
신제품 섬유유연제는 기존 모델들보다 물을 20%나 더 적게 사용한다. 매년 올림픽 규모 수영장 1,000만 개에서 사용되는 물을 절약할 수 있다.
슈어 컴프레스트 에어로졸 데오도런트 SURE COMPRESSED AEROSOL DEODORANT
유니레버는 2013년 추진용 가스와 알루미늄을 각각 50%, 25%씩 덜 사용하는 신모델을 출시했다. 용기 전체가 재활용되기도 한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BY VIVIENNE WALT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