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암군에 있는 대불국가산업단지. 조선기자재 업체가 밀집해 있는 대표적인 클러스터다. 10년째 택시를 몰고 있다는 기사 이형석(가명)씨는 “저녁7시 이후 산단 퇴근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회식차 목포로 나가는 손님들이 2~3팀은 됐는데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회식 자체가 사라졌다”며 “대리운전 기사들 중에는 목포역에서 산단 내 숙소로 들어오는 수요가 사라져 백수로 전락한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30분을 달려 도착한 대불산단은 황량했다. 조선업이 호황일 때는 도로 주변으로 출퇴근 차량이 즐비했지만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산업 구조조정 이후 차량도, 행인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간간이 수주에 성공한 일부 기자재 업체만이 생산 라인을 돌리고 있었다. 그나마 수주량이 미미해 오후4시가 되자 공장 문이 닫혔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대불산단 내 조선기자재 업체 임원은 “생산직 직원들은 보통 시급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일감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근무시간이 달라진다”며 “최근 들어 조선사들이 수주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 같은 중소 기자재 업체들에 온기가 전해지려면 발주 시점부터 적어도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체감경기는 여전히 바닥 수준”이라고 호소했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여파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비단 현대·삼성·대우 등 이른바 ‘빅3’ 근로자들만이 아니다. 대기업 하청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꼭짓점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1~2차 협력업체들로 삽시간에 번지고 소속 근로자들이 지갑을 닫는 바람에 생산직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소상인들의 생계도 한계 상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5월 말 현재 선박제조가 포함돼 있는 기타운송장비 제조업의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만5,000명이 감소했다. 쉽게 말해 1년 만에 이만큼의 숫자가 직업을 잃었다는 것인데, 특히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숫자가 30~40대다. 실업의 질이 매우 나쁘다는 뜻이다.
전남 영암뿐만 아니다. 조선기자재 업체가 많이 몰려 있는 부산과 거제 지역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 경남 지역의 제조업 업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전국 제조업 업황 BSI를 2014년 2월 이후 38개월 연속 밑돌고 있다. 지난해 평균 월중 어음부도율은 0.21%로 전국 평균(0.11%) 대비 2배 수준이다.
대형 조선사에 파이프와 모듈 유닛을 공급하는 중소기업 A사는 최근 설립 이래 처음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전체 근로자 13명 중 총 6명이 회사를 떠났다. 거래은행은 대출금 상환 연장을 위해 추가 담보를 요구했지만 여력이 없었고 일감이 사라진 상황에서 인력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A사 대표는 “직원이 자발적으로 회사를 나간 적은 있지만 일감이 없어서 내보낸 경우는 처음”이라며 “주력 제품인 모듈 유닛의 주문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상황”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에 나선 정부는 지난해 6월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 회의’를 신설(2년 한시)하고 중소기업 지원에 나섰다. 경제부총리 주재로 금융위원장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개 분과를 맡고 있는 이 회의에서 도출된 중소기업 대책은 △긴급경영안정 지원 △사업전환 및 다각화 지원 △고용을 포함한 기타경영 지원 등 세 가지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들은 하나같이 정부의 대책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제로 IBK경제연구소가 국내 조선·해운 협력기업 300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구조조정 관련 중소기업 지원대책 만족도 조사 결과(보고서명 ‘대기업 구조조정,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 42.3%의 기업이 ‘만족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은 자금지원 및 금융비용 부담 완화를 첫손에 꼽았다. 그만큼 당장의 배고픔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한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전체 지원을 100이라고 보면 현재 상황에 맞는 신규지원은 10에 불과하다”며 “나머지는 기존 정책의 홍보를 강화하거나 선정 우대 및 지원 규모 상향 정도의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특히 지역 경기의 풀뿌리 역할을 맡고 있는 소상공인을 위한 대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긴급경영안정자금의 경우 5,000만원 이내에서 특례보증을 제공하고 있지만 기업당 총 보증잔액 1억원 이내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이미 보증지원을 받은 소상공인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거제에서 조선업 관련 종사자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소상인 이재우(가명)씨는 “구매력이 높은 조선 업계 종사자들이 무너지면서 주변 식당들의 매출이 최대 70% 이상 줄었다”며 “보증재단 등과 연계한 소상공인 자금지원이 있지만 규모도 미미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남 영암=박해욱기자 백주연기자spooky@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