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정부가 집값 과열이 나타난 일부 지역에 대해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10%포인트씩 높이고 집단대출에 대해서도 DTI 규제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제목도 내용도 분명 ‘주택시장 안정’ 대책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래서 가계부채는 얼마나 잡힐 것 같냐”는 데 쏠렸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꼽히는 가계부채의 가파른 증가세가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된 부동산 부양정책의 결과라는 인식 때문일 겁니다.
◇가계부채, 왜 문제일까?
가계부채가 심각하단 경고가 연일 쏟아집니다. 매번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운다는 가계부채가 우리 경제의 ‘뇌관’이고 ‘시한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얘기도 이젠 익숙할 정도입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금융시장이 발달하면 부채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가계부채 총량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갚을 수 있는 빚이라면 개인은 빌린 돈을 지렛대 삼아 투자이익을 얻는 ‘레버리지 효과’를 누릴 수도 있고, 경제 전체적으로도 수요가 늘어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지금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까요?
간단히 말하면 소득은 늘지 않는 가운데 빚만 늘어나고, 빚부담에 짓눌린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의 2016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는 빚을 진 가구의 절반 이상(52.2%)이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러워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빚 갚느라 돈을 쓸 여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갑을 닫으면 기업이 신상품과 서비스를 내놔도 살 사람이 없으니 기업과 시장의 활력은 떨어지고, 투자와 소득도 늘어날 길이 없습니다. 가계부채가 저성장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가계부채로 인한 소비 위축과 내수 부진이 우리나라 경기 회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됐다는 분석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달 낸 보고서에서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경제 핵심 지표인 민간소비의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여전히 낮다”며 “가계부채로 인한 소비 제약 지속 등으로 국내 경기 회복세는 제한된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가계빚 실탄 삼아 이뤄진 건설경기 부양
사람들이 이렇게 상환능력 이상으로 빚을 지게 된 데에는 ‘빚 권하는 사회’를 조장한 정부의 책임이 작지 않습니다. 2014년 봄,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전 세계 경기가 얼어붙자 우리 수출도 기나긴 마이너스 성장의 터널에 들어섰습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게는 더 큰 타격이었습니다. 정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제·산업 구조개혁보단 급한 대로 단기 경기부양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집값과 건설경기로 경제성장률을 떠받치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가계빚을 부추겼습니다. 이 시기 미국과 일본은 정부지출을 늘려 경기 부양을 도모했고 중국·터키·브라질 등 신흥국은 수출 둔화를 타개하려 기업대출을 늘려줬는데, 우리나라는 가계대출을 늘린 겁니다.
2014년 8월 DTI와 LTV 완화를 시작으로 정부가 주택대출 고삐를 풀었고, 한국은행도 이때를 시작으로 지난해 6월까지 총 다섯 차례 기준금리를 낮췄습니다. 저금리와 부동산 규제 완화가 맞물려 가계빚은 폭증했습니다. 일을 해도 소득은 제자리고 일자리 사정은 갈수록 나빠지는데 ‘돈 싸게 빌려줄 테니 집 사라’고 부추기는 정책에 서민층도 동참했습니다. 가계부채는 2년 반만에 300조원 가까이 늘어 2016년말 1,3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2년말(465조원) 이후 가계부채가 300조원이 늘어나는 데 7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한 속도입니다.
이렇게 가계빚에 기댄 경기부양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습니다. 부동산 규제 완화로 부동산경기가 살아나면서 주거용 건설투자가 크게 늘었으니까요. 지난해에는 건설투자가 전체 경제성장률(2.8%)에 기여한 비율이 38%나 됐습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인 2011~2012년 건설투자의 기여율이 -13%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은 우리 경제의 장기적인 체력을 보강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됐습니다. ‘빚으로 지은 집’은 소득과 소비 증가를 이끌지 못했습니다. 소득과 부채의 증가율 격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우리 경제는 이제 ‘소비 감소→내수 침체→경제성장 위축→가처분소득 감소→가계빚 증가’의 고리에 갇힌 것처럼 보입니다.
◇가계빚에 기댄 단기부양책의 유혹, 이젠 벗어나야
사실 가계를 희생양 삼아 단기적으로 경기에 군불을 때온 정부의 경제 성장 전략은 보수·진보를 떠나 관행처럼 되풀이 됐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망가진 경제를 되살리려 소비 진작의 명목으로 신용카드 남발을 방조했고,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 정책을 통해 환율을 매개로 가계소득을 기업에 넘겨줬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가계에 주택담보대출을 지워 건설투자를 늘리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달랐을 뿐입니다.
전문가들은 이제 가계부채 문제가 ‘우리 경제의 성장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걸린 문제가 됐다고 지적합니다. 가계부채 문제가 지금 중요한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는 “지난 15년간 대증요법과 같은 단기 경기부양을 반복하면서 과잉투자 부작용만 늘었다”며 “성과를 못 내는 ‘가짜 투자’는 부채를 남기고, 이런 과잉부채가 터지면 금융위기로 가는 것”이라며 장기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경제 구조 개혁을 주문했습니다. 지금의 가계부채 폭증도 이제까지 반복해온 인위적 경기부양의 산물인 만큼, 이제 정부가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부채주도성장’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방법이 문제
새 정부가 ‘부채 주도 성장’에 맞서는 ‘소득 주도 성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가계부채에 대한 진단과 대책도 획기적인 대전환이 있을지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가계부채 대책에서는 ‘금융’이 아닌 ‘재정’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애초에 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돈만 더 빌려주거나, 도덕적 해이 논란을 낳을 수 있는 일괄 부채 탕감은 눈에 보이는 증상만 치료할 뿐이라는 겁니다. 정부의 서민정책금융상품들은 연체율이 일반 가계대출에 비해 최대 108배(‘바꿔드림론’) 높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입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은 이들에겐 상환 의지와 비례해서 채무부담을 낮춰주되, 근본적으로 주거안정, 실업급여 강화, 일자리 지원 등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저소득층의 소득 기반을 안정시켜주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게 가계부채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얘기입니다. 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들은 공공임대주택과 실업 지원, 노후연금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 우리나라보다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높은데도 가계부채 위험이 크지 않다는 사실은 생각해볼 만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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