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코스닥에 입성한 바이오벤처 기업 신라젠은 ‘장외시장 대어’로 불렸다. 하지만 늘 시장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파이프라인이 간암 치료제 ‘펙사벡’ 하나뿐이고 이마저도 임상시험 중이었기 때문이다. 제품 출시가 일러야 오는 2020년인 탓에 상장 후에도 신라젠의 기업가치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됐다. 최근 신라젠은 잇따른 호재를 만나며 시가총액 1조3,000억원의 코스닥 14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 LG화학(051910)(옛 LG생명과학)의 국산 신약 5호인 항생제 ‘팩티브’. 지난 2002년 국내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판매 승인을 받으며 글로벌 시장의 이목을 한몸에 받았다. 11년 동안 3,000억원을 투입해 기존 항생제보다 독성은 적고 약효가 월등한 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개발 단계에서 파이프라인이 노출되면서 경쟁사들이 복제약을 앞다퉈 출시한 것이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의약품을 만드는 바이오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핵심 요소로 파이프라인이 급부상하면서 이를 둘러싼 기업 간의 희비가 엇갈린다. 개발기간만 수년에서 수십년 이상 걸리는 신약 개발의 특성상 파이프라인을 추가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주가가 요동치고 기업가치가 급등락하는 등 거품 논란이 끊이지 않자 파이프라인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이런 행보가 파이프라인과 바이오 기업의 가치 평가에 대한 시장의 이해도를 높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외비로 다뤘던 파이프라인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시장과 소통에 나서는 기업이 증가하는 추세다. 파이프라인에 대한 평가에 따라 기업에 대한 가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투명한 공개를 원칙으로 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신약 파이프라인은 지난해 한미약품(128940) 사태를 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미약품이 글로벌 기업과 체결했던 일부 기술수출 계약이 해지되고 임상시험도 중단되자 파이프라인 전략에 심각한 균열이 생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한미약품은 파이프라인 공개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홈페이지 실시간 공개를 결정했다.
올해 초에는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파이프라인이 도마에 올랐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가 상장을 앞두고 삼성바이오에피스의 기업가치를 5조2,700억원으로 책정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정식으로 판매 허가를 받은 2종(SB2·SB4)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후속 제품이 성공적으로 국내와 해외에 출시되면서 논란은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최근 유럽 시장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임랄디’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5조~9조원에 이른다. 임랄디는 전 세계 1위 매출을 기록한 ‘휴미라’의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로 국내 최초이자 전 세계 두 번째 제품이며 지난해 약 18조원이던 휴미라 매출의 절반까지 가치를 평가하기도 한다.
신라젠의 항암제 ‘펙사벡’에 대한 시장 평가는 최소 1조원에서 최대 90조원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지난해 169억달러(약 20조원) 규모였던 전 세계 면역항암제 시장이 2022년 758억달러(약 90조원)로 커지고 펙사벡이 시장을 독점한다고 가정하면 90조원의 가치가 나온다. 진행 중인 임상 3상이 2019년경 완료되면 간암 치료는 물론 신장암·대장암 등 다른 암도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럼에도 파이프라인을 기업가치로 곧바로 연결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 신약 개발에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개발비도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이 투입되는 데다 실제 제품 출시로 이어질 가능성은 1%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만 보고 기업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 부담이 뒤따른다는 얘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신약 개발은 신차 출시나 신형 스마트폰 사양 공개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막대한 비용과 장기간의 투자를 하고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셀트리온(068270)과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주기적으로 파이프라인을 공개하고 한미약품이 실시간으로 파이프라인을 발표하면서 시장과 소통에 나서고 있다”며 “한국 투자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파이프라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파이프라인의 원래 의미는 원유를 운송하는 송유관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동차 등 제조업의 생산공정이 분업화되면서 각 제품을 만드는 전용 생산라인을 뜻하는 의미로 자리매김했고 제약사들은 연구실에서 개발 중인 신약 제품군을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른다. 지하에 매설된 송유관처럼 은밀하게 개발하는 신약이라는 의미와 함께 바이오 기업의 경쟁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됐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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