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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20>백남준 'TV정원'] 수풀 속 꽃처럼 피어난 TV...시간·공간을 초월하다

눕거나 천장 향한 수십개 모니터엔

세계각국 다양한 음악·춤 흘러나와

그의 범세계적·우주적 상상력 표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기술보다 동양전통·무속신앙 관심

독점 상업방송으로부터 자유 갈망

SNS로 실시간 소통 오늘날과 겹쳐

백남준 ‘TV 정원(TV Garden)’ 1974/2002년작 ⓒNam June Paik Studios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한 1932년 7월 20일에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하면 6월 17일(스탈린에 대항하는 봉기일)이다. 한국 전통에 따라 집에서는 음력 6월 17일에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학교 서류와 여권에는 7월 20일이 내 공식적인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날을 더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독일국민이 히틀러에 저항한 날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때문에 흘린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6월 17일 뿐만 아니라 7월 20일도 국경일로 정해야 할 것이다.

1933년에 나는 한 살이었다.

1934년에 나는 두 살이었다.



1965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될 것이다.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백남준 ‘TV 정원(TV Garden)’ 1974/2002년작 ⓒNam June Paik Studios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여기서 ‘나’는 백남준(1932~2006)이다. 이 글은 1965년 서른세 살의 백남준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한 동료에게 적어준 글이다. 태연하게 썼지만 백남준은 제국주의와 열강이 지배한 조국을 생각했고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대목은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는 게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천 살’ ‘십만 살’을 내다봤다는 점이다. 겨우 십 년 앞을 내다보는 뭇사람들을 향해 백 년, 천 년을 얘기하던 백남준. 신선 같고 때로는 무당 같았던 예술가 백남준이 여전히 살았더라면 오는 20일 여든 다섯 살 생일을 맞는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을 표방하는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 가면 전시장 한 칸을 가득 채운 비디오 설치작품 ‘TV 정원’을 만나게 된다. 우거진 수풀 속에 텔레비전들이, 마치 꽃송이처럼 피어오른 정원이다.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서슴없이 이 작품을 꼽았다.



백남준 ‘노마드’ 1994년 /사진제공=아라리오뮤지엄


보통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정면으로 보기 마련이나, 이 정원의 TV모니터들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아예 천장을 향하기도 한다. 수십 개의 모니터 속 장면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악과 춤이 백남준 특유의 흥겹고 현란한 편집으로 제작된 ‘글로벌 그루브’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미술관 실내에 자연의 환경이 조성됐나 싶더니 그 자연에는 텔레비전이라는 테크놀로지 기기가 안겨있고, 그 안에는 세계 각국의 다채로운 문화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범세계적, 범우주적 상상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던 백남준다운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던 1932년, 백남준은 육의전 포목상 집안으로 방직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을 통틀어 몇 손 안에 드는 부잣집 막내아들인 그는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고 일본에서 미술사와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복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고 그 결핍을 채우고자 1956년 독일로 갔고 음악적 스승 존 케이지를 만났다. 당시 전후 유럽은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깊었기에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고 백남준은 그 최전선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1959년에는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며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전 예술을 상징하는 피아노를 파괴한 것은 근대 서구 유럽 문화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한발 더 나아간 서른 살의 백남준은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한다. 루이 14세의 “짐은 곧 국가다”를 응용한 이 말은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누비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룬 정복자 칭기즈칸의 강렬한 화법을 닮았다. 백인 주도의 문화에 동양의 이질적 잠재력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백남준 ‘히드라부다’ 1984년작 /사진제공=아라리오뮤지엄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은 1963년 3월 독일 서부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렸다. 전시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들썩였다. 갤러리 입구에 걸린 도살된 소머리 때문이었다. 진동하는 피 냄새에 파리와 악취가 창궐해 결국 경찰이 나서 소머리를 없애버렸다. 백남준은 “소대가리를 오프닝 3일 전에 경관이 와서 제거했는데, 두개골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독일법이 있다 한다”며 투덜댔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소머리는 굿이나 제사에 올리는 동양의 샤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초승달 모양 뿔을 가진 소머리가 달(月)이나 대기권 상공에 뜬 인공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분석된다. 소머리를 뚫고 들어간 이 파르나스 갤러리 현관은 거대한 기상 관측용 풍선이 꽉 차 있어 비집고 기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내부에서는 13개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지직거리는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림은 없었다. 백남준의 친구가 된 독일의 개념미술가인 요셉 보이스가 개막식에서 도끼로 피아노 한 대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 전시는 미디어 아트의 출발점이자 서양미술이 근대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평가된다.

이후 백남준은 뉴욕으로 옮겨갔다. 1965년 당시 뉴욕을 처음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소공연장에서 방영한 것이 최초의 비디오아트로 미술사에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백남준에게 붙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수식어 탓인지 마치 그가 기술문명 신봉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동양의 전통과 정신성, 무속신앙과 선(禪) 사상 같은 것이었고 최첨단의 아이디어는 오히려 여기서 피어났다.

백남준이 첫 비디오테이프 상영회 때 발표한 ‘레이저 아이디어 3번’에서 시작한 ‘유토피안 레이저 TV 스테이션’은 미래의 다채널 방송국에 대한 예언이었다. 레이저의 고주파를 이용해서 수천 개의 크고 작은 TV 방송국들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 독점적인 상업적 방송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 그의 미래는 SNS와 1인미디어 등으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오늘날과 겹쳐진다.

아직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74년에는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와 함께 ‘W3(World Wide Web)’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인터넷 상용화보다 20년 먼저 현대사회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것이었다. 보통 기술 발전은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지만 백남준의 관심은 기술이 서로 떨어진 공간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까지 엮어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후 선보인 백남준의 일명 ‘위성 3부작’은 위성방송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조지 오웰이 1949년작 ‘1984’에서 매스미디어에 의한 감시 사회로 표현한 암울한 미래를 백남준은 굿판같은 위성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표현했고 이어 ‘바이바이 키플링’, 1988년 올림픽을 겨냥한 ‘손에 손잡고’로 보여줬다.

언젠가 백남준은 “TV 화면을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거장에 비할쏘냐. 오직 하나뿐인 우리의 천재를.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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