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푸른색의 추상화 ‘고요’가 65억5,000만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쓴 김환기(1913~1974). 그는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 가 추상미술에 본격적으로 눈 떴고 인생의 역작인 ‘전면 점화(點畵)’를 완성했다. 그렇게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얻은 김환기보다 10년 먼저 뉴욕에 정착해 추상미술가로 활동한 화가가 있었으니 김보현(1917~2014), 미국식 이름으로는 김포(Po Kim) 화백이다.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김포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귀국해 1946년 조선대 예술학과를 창립하며 첫 전임교수가 된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그의 인생이 휩쓸렸다. 1948년 여순사건 때는 좌익으로,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통역을 도와줘 우익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순조롭지 못한 인생의 고통을 잊고 “환상세계를 그림으로써 현실 도피”를 꿈꾸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그는 1957년에 완전히 뉴욕으로 터전을 옮겨버린다.
해방공간·한국전쟁 겪으며 고초
1957년 美 뉴욕으로 터전 옮겨
유토피아 그리며 역사 상처 극복
김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작가 사후 최대 규모로 마련된 회고전이 ‘김포:그때 그리고 지금(Po Kim:Then and Now)’이라는 제목으로 종로구 환기미술관에서 이달 말까지 열린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대표 작가인 윌렘 드쿠닝 등 뉴욕 주류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활동상이 세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시장 입구에는 초기작과 스케치, 유품 등이 국내에서 처음 선보여 작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대 재직시절 함께 근무했던 천경자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1층의 메인홀에는 작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이 거칠게 드러난 1960~70년대 추상표현주의 작품과 말년의 안정감이 따뜻한 2010년도 추상작품들이 마주 걸렸다.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선을 통해 동양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드로잉 작품은 김포가 사용한 서예 필력이 당시 뉴욕 화단의 거장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정물화에 탁월했던 작가는 이를 발전시켜 배경을 생략하고 색종이 테이프 등 다양한 재료를 붙여 꼴라주 작업도 전개했다.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내면의 고요를 되찾은 김포는 세계여행을 다니며 느낀 신비로운 감정들을 1980~90년대 작품에 쏟아부었다.
김포가 20년 이상 키운 앵무새 ‘찰리’를 어깨에 태우고 낙원을 꿈꾸던 아뜰리에 옥상 정원도 재현돼 눈길을 끈다. 감동의 절정은 전시의 마지막인 ‘유토피아’. 이방인의 비애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완성한 동양적 이상향이 6m 대작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 안에 들어서면 마치 벽화에 둘러싸인 듯 견고한 의지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추상미술 거장들과 어깨 나란히
초기작·대표작·스케치·유품 등
환기미술관서 이달 말까지 전시
김환기와 동시대에 활동하고 해외로 지평을 넓힌 한국 예술가들을 지속적으로 연구·발굴해 온 환기재단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왈드앤킴미술재단과 협력했다. 부부예술가였던 김포와 그 부인 실비아 왈드의 이름을 딴 이 재단은 뉴욕 현지에서 90평 규모의 비영리 전시공간도 운영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경제전문가로 활동하다 작가와 인연을 맺은 조영 왈드앤킴재단 이사장은 “김포가 1950년대부터 추상표현주의의 본토인 뉴욕에서 이처럼 활동한 것은 마치 1960~70년대 월가에서 한국인이 활약한 것만큼 놀라운 일”이라며 “작가 김포의 재발견은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를 10년 이상 앞당겨 자부심을 높이고 아시아 현대미술에서도 비교우위를 갖게 한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왈드앤킴재단의 목표는 김보현과 실비아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한국 현대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거점이 되는 것”이라며 “휘트니미술관이 미국미술을 알렸듯 한국미술을 알리는 플랫폼으로 한국의 사상, 고유한 매체, 독자성을 보여주고 레지던시 등 다양한 활동을 구상중”이라고 덧붙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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