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밑창의 쿠션을 조절할 수 있는 ‘에어시스템 운동화’,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바퀴 달린 운동화, 주’ 행 시 충격을 줄여주는 ‘충격 완충 인라인스케이트’. 독창적인 컨셉트로 세간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이들 제품은 모두 한 발명가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주인공은 ‘괴짜 발명왕’으로 유명한 전필동 엔비의료기 대표다. 그가 이번에는 혁신적인 공기청정기를 들고 나와 세상을 들썩이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중학생 야구선수가 아버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빠, 저는 체중이 적어서인지 운동화를 신고 뛰어도 탄력이 안 나오고 서전트 점프를 해도 높이가 안 나와요.”
아버지는 아들의 푸념을 흘려듣지 않았다.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 직감적으로 뭔가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요컨대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 사이즈에 맞는 운동화를 골라 신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체중이 다를 뿐 아니라 신발을 착용하는 환경도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발사이즈에 맞는 운동화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체중과 착용 환경에 맞게 운동화의 쿠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문제의식에 어떤 확신이 들었다. ‘그래, 쿠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운동화를 만들어보자!’ 그는 머리를 싸매고 1년간 땀방울을 쏟은 끝에 마침내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해냈다. 공기 주입을 조절하는 장치를 이용해 쿠션 강도를 착용자에게 최적화할 수 있는 이른바 ‘에어시스템 운동화’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다름아닌 전필동 대표였다.
그는 얼마 뒤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하기 위해 해머 스포츠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해머스포츠는 1994년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국제신발·스포츠레저용품전시회(PIFOS 94)’에 에어시스템 운동화를 선보이며 큰 돌풍을 일으켰다. 전시회 기간 동안 성사된 전체 계약 금액의 절반을 차지하는 엄청난 성과를 얻은 것이다. 에어시스템 운동화가 전시회에서 큰 관심을 받자 언론매체들도 잇달아 전필동 대표를 조명했다. 로이터 등 유수의 외신들도 비중있게 소식을 다룰 정도로 전 대표는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국내 신발업계에 전필동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확고하게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90년대 ‘에어시스템 운동화’ 선보여 큰 화제
“제가 처음 발명한 게 ‘톱니 국자’였습니다. 어느 날 국자로 라면을 뜨는데 너무 안 떠져 짜증이 나더군요. 그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라 궁리 끝에 발명한 상품이었는데 꽤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저는 원래 아마추어 조각가로 활동했습니다. 하회탈이나 각시탈처럼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공예품 사업도 좀 했었죠. 하지만 중국산 저가품 때문에 별 재미는 못 봤어요. 그러다가 배고픈 예술을 접고 소질을 살려 발명가로 전업하게 된 겁니다.”
지금껏 전필동 대표의 머리와 손끝에서 탄생한 발명품은 60여 개에 달한다. 그중 특허로 등록된 것만도 20개 정도 된다고 한다. 그의 발명에는 한 가지 일관된 특징이 있다. 기성 제품의 불편함이나 문제점을 대폭 개선하거나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전 대표는 어떤 제품을 접하더라도 ‘문제 제기’부터 하는 게 습관이 됐다고 한다.
전 대표가 말한다. “제가 발명한 제품들이 나름대로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소비자의 시각에서 개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발명의 아이디어를 일상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아이템에서 찾습니다.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정면에서 보지 마라, 뒤집어서 봐라, 공식을 정해놓지 마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라’는 것이 저의 발명 신조입니다. 에어시스템 운동화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발명품이었죠.”
전 대표는 해머스포츠 창립 첫 해에 에어시스템 운동화로 1,0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달성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국내 신발업계에서 ‘신성(新星)’으로 주목을 받게 된 그는 한국신발중소기업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2년간 재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급격하게 성공을 거머쥔 전 대표에게 질투의 여신이 시샘을 했을까. 주변의 감언이설에 휩쓸린 그는 대리점을 모집해 사업 확장을 시도하다가 예기치 못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치밀한 사업 전략을 마련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다 고배를 들게 된 것이다. 전 대표는 “인기는 잠깐이었고,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성공 뒤의 실패는 사람을 두 갈래 길로 인도하는 법이다. 한쪽은 재기, 다른 한쪽은 좌절이다. 전 대표는 특유의 뚝심과 낙천적 기질로 실패를 극복해냈다. 더욱 단단해진 그는 나아가 에어시스템 운동화에 못지않은 혁신적 상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신발업계에 ‘전필동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컬러 운동화, 바퀴 달린 운동화, 충격 완충 인라인스케이트 등을 출시해 모두 히트작 반열에 올린 것이다.
10여년간 신발업계에서 영욕을 경험한 그는 2000년대 중반 무렵 다른 분야로 발을 내딛는다. 그가 새롭게 선택한 아이템은 배와 허리를 졸라매 체형을 보정하는 여성용 속옷인 코르셋이었다. 전 대표가 코르셋을 선택한 것도 ‘생활 속의 발견’ 덕분이었다.
그가 회고한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외출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보니까 아내가 코르셋을 입는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겁니다. 그 장면을 보고는 허허 웃는데 아내가 ‘당신이 명색이 발명가인데 이런 거나 좀 쉽게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봐요’라며 쏘아붙이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여성들이 손쉽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코르셋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코르셋은 몸을 조여줘야 하기에 여성들이 혼자 입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특수 지퍼를 고안했습니다. 여성들이 적은 힘으로도 코르셋을 강하게 고정시켜 줄 수 있는 ‘듀얼(Dual) 지퍼’였죠. 듀얼 지퍼는 지퍼의 이빨을 한 줄 더 달아놓은 구조인데, 억지로 채워도 고장이 나지 않고 체결 성능도 뛰어납니다.”
‘엔비코르셋’ 등 의료기기 사업도 성공
전 대표는 핵심 부품인 듀얼 지퍼를 기반으로 다양한 실험을 한 끝에 마침내 S라인 몸매를 갈구하는 여성들을 위한 신개념 코르셋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제품에 ‘엔비(NB)코르셋’이라는 브랜드를 달아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올바른 체형 관리와 보정을 위한 방법을 연구·개발하는 한국체형보정의학연구소도 설립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주력 사업도 의료기기 분야로 전환했다.
현재 엔비의료기는 엔비코르셋을 필두로 힐링 슈즈, 메디컬 슈즈, 발가락 교정구 등 다양한 의료기기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특히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입은 제품이라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던 엔비코르셋은 올바른 체형과 멋진 몸매를 원하는 여심(女心)을 파고들어 스테디셀러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0년 처음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 누적 매출액은 약 1,600억원에 달한다.
수많은 발명품을 선보이고 사업적인 성공도 경험해본 전 대표이지만, 그의 ‘발명가 본능’은 좀처럼 쉴 줄 모르고 오히려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는 오는 8월 신개념 공기청정기 ‘나노워셔(Nano Washer)’를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국내 시장은 물론 중국과 인도 등 해외 시장에도 동시 출시한다는 목표다. 나노워셔는 2010년 무렵 처음 착상했던 아이템인데,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서 얼마 전 시제품을 완성한 데 이어 출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공기청정기는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에 매우 긴요한 제품이다. 특히 갈수록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일반 가정의 공기청정기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전 대표가 시대적 요구와 딱 맞아떨어지는 아이템을 선택한 셈이다. 나노워셔는 전 대표가 “발명가 인생의 최대 역작”으로 주저 없이 꼽을 만큼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특히 나노워셔는 기존 공기청정기 제품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는 평가다.
공기청정기가 미세먼지, 세균, 유해 가스 등 공기 중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필터를 이용해 여과·흡착해 걸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필터라도 오염 물질을 100% 제거할 수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염 물질의 크기가 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나 나노미터(nm, 10억분의 1m) 단위처럼 극도로 미세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터 방식의 공기청정기는 일정한 주기로 필터를 교체하거나 자주 세척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필터를 오래 쓰면 공기가 다시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시되고 있는 공기청정기 중에는 필터와 함께 ‘물’을 추가적인 필터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필터를 통과한 공기를 물로 한번 더 씻어내는 방식이다. 물은 그 자체로 탁월한 정화 능력을 갖고 있다. 흔히 화재가 일어나면 대피할 때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는다. 화재로 발생한 연기가 물을 통과할 때 유해 물질이 걸러지기 때문이다. 이는 물이 곧 가장 뛰어난 필터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전필동 대표는 신개념 공기청정기 개발에 나서면서 기존 제품들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아울러 공기청정기에 수반되는 과학적 이론들도 치밀하게 연구했다. 기존 공기청정기들의 허점을 발견하는 한편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먼저 기존 제품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필터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왜 반드시 필터를 사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물의 강력한 정화 능력을 주목하게 됐고, 물 자체만으로 오염 물질을 걸러낼 수 있는 공기청정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물을 필터로 사용하는 기존 제품들의 구조와 성능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참고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각종 테스트만 무려 600회 이상 했을 정도다.
성능·경제성 탁월한 공기청정기 ‘나노워셔’ 발명
전 대표가 말한다. “처음부터 물을 분사해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방식의 제품을 구상하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물을 끌어올려 분사하려면 모터 펌프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모터 펌프의 소음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유명 기업 제품들을 뜯어보니까 소음을 줄이기 위해 방음막을 겹겹이 쳤더군요. 그걸 보면서 ‘만약 소음 없이 물을 끌어올려 분사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면 내가 이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뭐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작업을 할 정도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결국 해답을 찾았죠.”
일반적으로 공기청정기는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한 팬(Fan·선풍기 날개)을 장착하고 있다. 전 대표는 오랜 고민 끝에 번득이는 묘안를 찾았다. 공기청정기의 팬이 돌아가는 동력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분사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팬의 중심축에 길쭉한 원통을 연결 시켰다. 이중 구조로 설계된 원통의 외벽에는 미세한 구멍이 수없이 뚫려 있다. 팬이 회전하면 원통이 함께 돌아가면서 아래쪽 수조의 물을 끌어올려 분사하게 된다. 공기청정기 하단의 흡기구로 들어온 공기 속의 오염 물질은 원통이 분사하는 ‘폭포수’를 맞으면서 걸러진다.
전 대표가 발명한 나노워셔는 기존 공기청정기 제품들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다는 평가다. 우선 모터 펌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소음이 없고 전력소비량도 적다. 게다가 아주 단순한 구조로 설계됐기 때문에 제조 원가가 적게 든다. 한마디로 경제성이 뛰어난 제품이라는 뜻이다(전 대표는 기존 제품보다 훨씬 싼 가격에 나노워셔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물론 공기 정화 능력도 탁월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필터로 평가되는 물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활용해 나노미터급 초미세먼지까지도 100% 걸러낼 뿐 아니라 가습 효과도 뛰어나다는 게 전 대표의 설명이다.
“저는 나노워셔가 그 어떤 공기청정기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자부합니다. 주변에서는 국내외 유수의 대기업들이 공기청정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작은 회사가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품이 우수하면 반드시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노워셔가 출시되면 머지않아 공기청정기 시장 자체가 바뀔 겁니다. 필터 방식은 사라질지도 몰라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기존 기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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