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기분 좋은 날이 있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고, 털어 말린 머리가 뜻대로 자리 잡았으며, 무심코 집어든 양말이 바지 색과 썩 잘 어울리는 데다 출근길 지하철이 기다리지 않게끔 맞춰 도착했다. 딱히 특별할 일 없지만 그런 소소함에 기분이 좋아서, 준비 부족한 기획안이나 심지어 계획안 했던 사랑 고백까지도 받아들여질 듯한 그런 날이 있다.
요절한 화가 최욱경(1940~1985)의 1977년작 ‘환희’는 꼭 그런 기분 좋은 날의 일기 같은 그림이다. ‘환희’라는 단어의 의미는 엄청난 큰 기쁨이지만, 그림 속 환희는 기쁨으로 충만하되 미쳐 날뛰진 않는다.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환희도 그와 비슷하리라. 보드랍고 달콤한 노란색 사이로 즐거움의 조각들이 생의 찬미를 노래한다. 자유로운 곡선들이 춤추고 분홍, 보라, 연두 등 화사한 파스텔톤 색채들이 주변을 밝힌다. 간혹 짙은 어두운 색덩어리가 있지만, 음악으로 치면 묵직한 베이스 선율처럼 든든하기만 하다. 그림 중간중간에 오늘 만난 하늘 색, 노을 색도 보이니 반갑다.
최욱경은 45세에 요절한 여성화가다. ‘한국적 색채 추상의 선구자’ ‘한국적 추상표현주의자’로 불리는 화가이건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인지 미술사적 업적에 비해 덜 유명하다. 출판업을 하는 부친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고, 부모도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낙원동 집 마루에서 크레파스로 곧잘 그림을 그리던 최욱경은 한국전쟁이 터지던 1950년 그해 어머니 손을 잡고 당대 최고의 부부 화가 김기창·박래현의 을지로 화실에 갔고 처음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화여중·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재학시절부터 대담하고 솔직한 색채를 구사했고, 성격도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학원 진학의 기로에서 대부분 화가들이 파리로 유학가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택했다. 1963년 미술학교로 유명한 미시간주 크렌부룩아카데미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으로, 조각과 도자기를 부전공으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정신박약아를 위한 미술 교사로, 대학 강사로 일하면서 콜라주와 다양한 매체 실험을 병행했다.
최욱경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된다. 추상표현주의란, 전쟁 후 인간이 경험한 분노와 공포, 경계와 희망이 뒤섞인 감정을 표현한 예술 전반을 가리킨다. 잭슨 폴록처럼 액션 페인팅을 하는 작가가 있었고 색면 추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화가도 있었으며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다루지 않고 잠재의식을 분출하듯 그림을 그리는 경향 강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최욱경은 당시의 주류 미술을 흡수했으나 결코 미국식 미술에 함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구축한 그는 1970년대에 한국의 단청, 민화 등의 전통적인 색감과 뉴멕시코에서 본 자연에서의 영감 등을 뒤섞어 본격적인 색채연구를 전개하며 더욱 풍성한 그림을 선보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화단은 하나의 색조로 화면 전체를 뒤덮는 ‘단색화’가 주도하던 시기였기에 강렬한 색감의 최욱경은 이방인 같았다. 고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 만의 그림 세계를 고집했다. 그 덕에 한국적 색채추상의 선구자 자리를 이견없이 꿰찼다. 작가 작고 후에 기획된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이 같은 후기 색채 추상을 주목했다.
작고한 이경성(1919~2009)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예술가를 단·중·장거리형의 세 유형으로 나눠 “단거리형이란 20대에 요절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죽는 사람인데 흔히 천재라 불리는 사람이 이 부류”이고 “중거리형이란 30대 후반 그러니까 38세를 전후로 해서 죽는 사람들인데 비교적 많은 좋은 화가가 중거리형”이며 “장거리형이란 거의 90고령에 도달하는 장수의 예술가로서 30고개를 넘어서면 90고개에 직결”된다고 했다. 최욱경 작고 직후인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을 준비하며 이 전 관장은 “최욱경은 중거리의 생애로서 다른 사람이 90년에 할 일을 다하고 갔다”면서 “타고난 예술가, 천생 예술가로 감성이 예민하여 보통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고 평했다. 흔히 ‘예술은 고독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고독할수록 더 확대된 시야로 세계의 미를 보고 그렇게 본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실현한다”는 진리가 딱 최욱경의 얘기다.
오방색의 강렬한 작품도 좋지만 흑백을 위주로 그린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희고 검은 단 두 가지 색을 썼을 뿐이지만 작가는 소용돌이치는 붓의 흔적으로 폭발 직전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보여준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맞춘 듯 그림으로 그려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상설전시실에 걸려있는 1977년작 ‘무제’를 두고 어떤 이는 큰 눈 껌뻑이면서도 콧김 내뿜는 소의 얼굴을 보았다고도 했다. 달과 바람과 꽃과 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듯하다. 이 작품은 1969년작 ‘레다와 백조’, 1976년작 ‘강강수월래’, 1977년작 ‘마사 그래함’처럼 많지는 않으나 주기적으로 등장한 최욱경의 흑백 회화 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는 최욱경을 회상하며 “1984년도의 작품들에서는 조금씩 충동적이거나 불편한 선(線)이나 색채가 보이고 구성에서도 흐트러짐이 발견된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면서 “죽기 1,2년 전의 그의 작품에서는 생에 대한 환희나 자연에 대한 감동이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품을 통해 신호를 보냈던 것일까? 1985년 여름, 최욱경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가장 미국적 사조인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했으나 한국적 구도와 색깔, 재료의 독창성으로 한국적 정체성을 반영한 최욱경은 작고 후 떠들썩한 ‘고초’를 겪는다. 학을 즐겨 그리던 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 그린 ‘학동마을’은 2007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차장이던 시절 당시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인사청탁성 뇌물로 건네진 혐의를 받아 세간을 시끄럽게 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 하나를 두고 붉은 색조가 지배적인 추상화인데, 학이 보이지는 않지만 날아오르는 그 기운이 생생한 그림이다. 2011년 4월 한상률 전 청장이 기소되면서 ‘학동마을’은 검찰에 압수돼 급기야 재판장에까지 나왔다. 당시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그림이 법정에 등장하자 변호인 측은 “전문가가 봐야겠지만 정말로 유명한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면 그래도 살만한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알만 한 미술계 전문가들은 ‘치욕’이라고 한 이 사건을 작가가 살아서 목격했더라면 까무라쳤을 일이다.
화가이지만 그녀는 문학적 감수성이 충만했고 그 일부를 작품 제목에 담았다.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1966년), ‘악몽은 견디기에 정말 너무 길다’(1975년), ‘한때 호색가가 기이한 꽃을 주었다’(1975년작),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년), ‘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슬프다’(1983년작) 등은 제목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충만한 문학적 감수성의 파편으로 쓴 시 45편은 1972년에 ‘낯설은 얼굴들처럼’이라는 제목의 시화집으로 출간됐다.
그저 살아지는 나날들이지만, 그렇다고 사는 것이 녹록지만은 않다. 외롭고 고달플 때, 감정이 치솟고 온몸이 달아오를 때, 그럴 때면 불꽃처럼 그리고 꽃잎처럼 살다간 최욱경의 그림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도 내일은,/
다시 /
솟는 해로 밝을 것입니다./
꽃피울 햇살로 빛날 것입니다. //
그리고 또, 내일들은….” (최욱경 시 ‘그래도 내일은’ 중에서)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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