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解放)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까지 꼬박 36년간 식민지배를 겪었다. 그 암흑 같은 시절에서 빛을 되찾은 날이 바로 광복절이다.
‘해방고지’는 그 기쁨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제목에는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리는 ‘수태고지’와 같은 작법이 쓰였다. 그림 왼편에서 맨발로 달려오는 하얀 한복 입은 두 여인이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얼마나 좋았던지, 얼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픈 마음에 여인은 옷섶 위로 젖가슴이 빠져나온 줄도 모른 채 숨 가쁘게 뛰고 있다. 화면 오른편 사람들이 일본이 패망했다는, 그래서 이제 해방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 분홍치마를 동여맨 아낙, 우람한 팔뚝의 장정, 벌떡 일어나 앉은 머릿수건의 여인 등 해방 소식을 들은 이들은 흥분하기보다는 결연하고 굳은 의지를 표정으로 드러낸다.
그들 뒤로 ‘진정 이게 사실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운 사내의 크고 둥근 눈이 또렷하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이쾌대(1913~1965) 자신의 얼굴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검은 모자를 쓴 채 정면을 응시하는 자기 얼굴을 그려넣은 것처럼, 이쾌대 역시 역사의 목격자로서 자신을 그림에 숨겨뒀을지 모른다.
기쁜 소식이건만 그림은 결코 밝지 않다. 이미 참혹하게 죽어 흙빛이 된 시신 이를 붙들고 오열하는 사람, 분노로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이 그림을 에워싸고 있다. 이들의 희생과 고통이 밑거름되어 오늘의 해방을 얻어낸 것이리라. 화가의 애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맥없이 주저앉은 반라의 어미 곁에서 발가벗은 채 젖 찾아 입 내민 아기가, 작지만 화면 중앙에 자리 잡았다. 희망의 씨앗이다. 그림 아래쪽으로 쓰러져 누운 사람의 몸 위로 울긋불긋 자라난 꽃나무와 그 사이로 뻗어나온 손이 이들의 모습을 떠받치는 듯하다. 그림의 주제는 뒤쪽 배경을 이루는 하늘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소식이 전해오는 왼쪽 하늘에서는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이 빛은 오른쪽으로 향하며 폭격의 검은 연기와 가시지 않은 먹구름을 밀어내는 중이다. 저 멀리 밝은 들판을 향해 달려가는 소의 뒷모습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국인의 기상이 감지된다.
이쾌대의 비운은 ‘월북화가’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작가가 근대미술사의 빛나는 업적은 묻혀있었고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는 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20여 년이 지난 1988년에 월북작가 해금 조치가 이뤄졌고 1991년 신세계 창립 29주년으로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렸을 때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가 열려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난 이쾌대는 조부 이선형이 지금의 검찰총장인 금부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시장 격인 현감을 지낸 세도가 출신이다. ‘3만석꾼’ 대지주 집안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가 자란 집은 “성처럼 높은 담장이 5,000여평을 둘러싸고 집 안에 교회·학교·테니스코트가 갖춰져 있었다”고 전한다.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열 살 때 대구로 유학한 후 경성 휘문고보에 진학해 장발(1901~2001)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야구선수로도 활약했다. 당시 ‘모던보이’가 그랬듯, 이쾌대는 이름만큼 쾌활한 멋쟁이였다.
사랑에도 뜨거웠던 그는 아름다운 처녀 유갑봉(1914~1980)과 열애 끝에 스무 살에 결혼해 이듬해인 1933년 일본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인물화에 몰두한 이쾌대의 모델은 모조리 유갑봉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렇다고 사랑에 눈 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선의 전통미를 풍기던 여성상은 점차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내며, 세련된 신여성과 주체적인 지식인으로 변화해 간다.
형인 좌익 항일운동가 이여성(1901~생몰년미상)의 영향을 받은 이쾌대는 해방 직후 좌익 성격의 미술단체에 가입했으나 회의를 느끼고 탈퇴해 중립을 표방하는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했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개인화실을 겸해 미술학도 양성을 목표로 ‘성북회화연구소’를 운영했고 ‘물방울’화가 김창열, 차가운 돌에서 따뜻한 가족애를 끌어낸 조각가 전뢰진 등의 제자를 키워냈다. 사실적인 인체 표현을 연구하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그랬듯 ‘미술해부학’ 그림책을 남긴 것 또한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지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서울에서 북한 지도부의 강요로 인민군 부역화가로 활동해야 했다. 그 바람에 서울 수복 후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는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그리운 아내의 얼굴을 그렸고, 그 솜씨가 눈에 띄었던지 미군의 초상화도 그려줬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그는 북을 택했다. 형이 이미 월북한 뒤라 정치적 위협을 느낀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에서도 화가로도 활동했지만 형이 김일성을 비판하다 숙청된 후 이쾌대는 남북한 양쪽에서 ‘금기화가’로 낙인찍혔다.
홀로 네 자녀를 키운 이쾌대의 ‘뮤즈’ 유갑봉은 서울 신설동 집 다락방에 남편의 작품을 한 점도 잃어버리지 않고 숨겨 보관했다. 한옥이었기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이한우 씨조차 장성한 후에야 다락방 그림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이쾌대는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라”고 당부했지만 유 여사는 그림 팔라는 유혹을 뿌리치며 생계가 어려워도 그림을 지켜냈다.
‘해방고지’를 포함한 일련의 그림들은 모조리 그 다락방에서 나왔다. 이쾌대는 해방 직후 전성기의 필력으로 수십 명이 한 화면에서 꿈틀대는 2m 이상 대작 ‘군상’을 연작했다. 총 4점이 전하는 이들 그림은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고 우리식의 미술을 시도한 역작으로 꼽힌다. 미술평론가 최열이 “해방공간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며 낭만주의의 격렬함으로 뒤엉킨 서사시”라 평한 이 그림들은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다비드, 낭만주의 대표작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역사화, 멕시코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 벗은 마야’를 연상하게 하는 ‘누워있는 나부’나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생각나게 하는 ‘조난’ 등 이쾌대의 그림에서는 19세기 서양미술의 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가 어떻게 한국적으로 탈바꿈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양미술을 두루 섭렵한 것을 기반으로 우리 미술의 전통을 꽃피운 이쾌대라는 인물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구도의 이 그림에서 이쾌대는 평화로운 농촌을 배경으로 팔레트와 붓을 든 화가로 자신을 표현했다. 하늘을 닮은 맑은 파랑색 두루마기가 경쾌한 반면 표정은 진지하고,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과 큰 눈은 단단하면서도 예민하다. 중절모를 썼지만 한복을 입고 동양화 붓을 들었다는 점은 서양화를 그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해방의 기쁨을 쏟아내고 역사의 아픔 속에 묻혀 떠난 화가 이쾌대는, 그런 화가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