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총수가 장기 부재중인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모두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했다. 과거 두 차례 총수 부재 상황에 직면했던 SK그룹의 위기경영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서였다. 애초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최종현 선대회장 때 설치된 그룹 사장단회의로 최고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최 회장의 첫 구속을 계기로 이후부터 그룹과 계열사 간, 계열사 사이의 조정과 협의 조직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2013년 최 회장의 장기 부재 시 SK그룹이 위기를 헤쳐나갈 힘이 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SK그룹은 일찌감치 황제경영 방식에서 벗어나 계열사의 독립경영과 느슨한 연대 방식으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며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전문경영인들이 최 회장의 공백을 잘 메웠다”고 설명했다.
한화그룹 역시 2013년 김승연 회장 부재 당시 그룹 내 원로경영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상경영위원회’를 꾸렸다.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이 위원장과 금융 부문을 맡았고 제조 부문과 서비스 부문은 각각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과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이 맡았으며 최금암 그룹경영기획실장이 실무총괄위원을 담당했다.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이재현 회장의 부재 당시 CJ그룹 역시 손경식 회장과 이채욱 부회장 등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를 출범시켜 공백을 메웠다.
이재용 부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은 삼성그룹 역시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했지만 SK그룹이나 한화그룹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평가다. SK와 한화·CJ는 지주회사가 완성됐거나 진행 중인 단계로 계열사의 독립경영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돼 있었다. 그리고 그룹 전체를 챙길 수 있는 원로의 구심점 역할이 도움이 됐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최근까지 총수에게 그룹 경영 권한이 몰려 있는 구조인데다 그룹을 아우를 만한 원로도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다.
비상경영체제의 한계도 분명했다. 일상적인 경영 활동은 문제가 없었지만 인수합병(M&A)을 포함한 대규모 투자와 신사업 등 기업의 미래전략 등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실제 M&A에 강했던 SK그룹은 최 회장 부재 당시 굵직한 인수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었다. CJ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2014년부터 2년여간 코웨이 등 숱한 딜(deal)에 뛰어들었으나 중도 포기했거나 탈락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김승연 회장 구속 당시 이라크 정부가 비스마야 신도시 개발과 관련해 한화에 ‘클레임’을 걸어 정부가 보증에 나선 사례는 유명하다”며 “총수가 없어도 기업은 현 상황을 유지하겠지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업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박성호·박윤선기자 junpark@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