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원 자녀 우선채용’은 취업준비생들의 공정한 기회를 박탈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기업은 이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자율시정을 권고하고 있지만 일부 노조는 노사 자율협약이라며 버티는 모습이다. 기업 역시 ‘고용세습’ 폐지에 소극적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 노조원 자녀 채용 사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게 대부분 기업의 입장이다.
고용세습의 위법성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를 폐지하거나 단체협약에서 삭제하는 등 실제 이행되는 사례는 기대 이하다. 지난 2016년 고용노동부가 전국 100인 이상 노조가 있는 2,76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단체협약 실태 전수조사 결과 694곳이 노조원 자녀의 우선·특별채용을 보장하는 고용세습 조항을 둔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1년여 후 ‘고용세습’이 남아 있는 사업장을 다시 확인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곳은 여전히 관련 조항을 남겨두고 있었다.
정부가 나서서 자율시정을 권고했지만 상당수 기업과 노조는 콧방귀도 뀌지 않은 셈이다. 정부의 권고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노조에서 해당 조항 삭제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 임단협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협상 전인 올해 3월 노조 소식지를 통해 ‘시정명령을 받은 단협 조항은 올해 임단협에서 절대로 논의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울러 해당 단체협약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 역시 시정에 소극적이다. 이미 사문화된 조항이기 때문에 없애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괜히 노조를 자극해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서 불리해질 필요가 없다는 이유가 크다. 한 대기업 인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최근에는 특별채용 사례가 전혀 없다”며 “문제가 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폐지 얘기를 꺼냈다가는 노조가 더 큰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교적 노사관계가 원만한 경우에도 기업이 먼저 나서서 삭제나 폐지에 대한 말을 꺼내기는 어렵다. 한 철강 업체 관계자는 “이 조항을 유지하는 것은 노사 모두 득이 되는 게 있기 때문”이라며 “노조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사측 입장에서는 노조가 이런 조항 때문에라도 다른 사안에 있어 반발을 덜 하니까 나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십년째 무분규라고 내세우는 업체들을 보면 대부분 그런 조항이 적용된 곳으로, 또 괜히 그 조항을 지우려고 노조랑 트러블을 만들 이유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위법적인 내용인 만큼 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달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대기업 노조들의 고용세습 행태에 대해 정부 개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여전히 정부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친노동적 성향이어서 노동계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지, 실제 의지가 있는지 우려스럽다”고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 노사의 자발적 ‘고용세습’ 조항 삭제는 아직 이를 바꾸지 못하는 기업에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노사가 한발씩 양보해 큰 잡음 없이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결국 사측이 협상 테이블에 문제를 올릴 수 있는 용기와 함께 노조의 관용이 필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SK이노베이션 노사가 이번 임단협에서 ‘고용세습’ 폐지를 결정하면서 SK그룹 주요 계열사 단협에서는 ‘고용세습’ 조항이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SK하이닉스 역시 2015년 ‘고용세습’ 조항을 단협에서 삭제했다.
또 SK이노베이션이 ‘임금인상률의 물가 연동’ ‘매칭그랜트 방식 노사 기부’ 등 상생협력의 모습을 보인 만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사회와 함께하는 딥체인지’도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 회장은 6월 열린 ‘확대경영회의’에서 “단기간 고도성장 속에서 사회·경제적 문제가 발생하고 심각해지고 있다”며 “대기업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사회문제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상생과 협력을 강조한 새로운 경영전략 ‘딥체인지 2.0’을 제시한 바 있다. 노조 역시 이런 최 회장의 철학에 공감하고 화답의 제스처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SK이노베이션 임단협은 사측뿐 아니라 노조가 과감한 양보를 많이 한 느낌을 받는다”며 “노조가 사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사측에서도 경영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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